중국이야기 70 나씨들의 시조 마을 나가촌(羅家村)
중국이야기 70 나씨들의 시조 마을 나가촌(羅家村)
  • 강원구 한중문화교류회 회장
  • 승인 2013.03.14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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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구 박사

남창시청 옆의 감강 벽에는 강서성 출신들의 조각 작품이 많이 있다. 너무 많다보니 걸어가면서 보기 힘들어 조그만 차를 타고 다니면서 볼 수 있도록 했다. 주자(朱子)선생을 비롯하여 왕안석(王安石) 등 한눈에 강서성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곳이다.
감강대교 바로 옆에 하늘을 한번 도는 대관람차가 있다. 세계 제일의 관람차로 한 바퀴 도는데 30분 걸리며, 멀리서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칸 안에는 전화, 에어컨 등이 있어 편리하게 되었으며, 높이는 165m이다.
중국의 우리나라 성씨의 기원이 많다. 역사상 오랫동안 교분을 갖고 보니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와 정착한 이도 있고 망명이나 귀양 왔다가 아예 손을 뿌리고 정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씨는 황제(黃帝)의 후손인 광정공(匡正公)이 주나라에서 공을 세워 나국(羅國)에 봉해졌으므로 나씨라는 성을 최초로 갖게 되었고, 그의 후손 주공(珠公)이 한나라 초에 큰공을 세워 예장군(豫章郡)에 봉해졌으므로 예장 나씨의 시조가 되었다.
우리나라 금성 나(羅)씨는 중국 강서성 남창으로부터 온 것으로 나타났다. 당나라 태종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였던 나지강(羅至强)은 1,300여년 전 예장(豫章: 남창)에서 우리나라에 망명하여 나주에 정착, 신라조에 벼슬하여 좌승상에 이르렀다.
나주 나씨의 시조 나부(羅富)는 북송시대 남창사람으로 금나라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급해지자 사신으로 고려에 왔다가, 북송이 멸망(서기 1127년)하면서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려에 귀화하여 나주에 정착하였다. 고려에서 ‘상장군’이란 직책을 받았다.
나씨들의 족보를 보고 남창에 ‘나가촌’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가보았다. 우리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300여명이 환대를 해주었다. 그리 크지는 않으나, 족보에 대한 것은 잘 만들어 두었다. 이 지역에 약 1만 명 정도 살고 있고, 지금 나씨들의 시조 사당을 크고 새롭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인연으로 남창시와 나주시간에 자매결연을 맺게 해주었으며, 남창시장과 나주시장이 자주 방문하기도 한다. 광주와 남창간에 정율성 선생 국제음악제도 열렸다. 광주에서 남창으로 공연단이 150여 명 갔으며, 남창에서 광주에 100여명이 오기도 하였다.
남창시내에 있는 팔대산인(八大山人)의 유적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팔대산인은 성은 주 이름은 대, 큰 대(大) 아래 귀 이(耳)자가 붙는 글자로 우리 옥편에 나오지 않는 글자다. 아마도 큰 귀이니까 ‘남의 말 잘 알아들을 대’ 자임에 분명하다.
명나라 황제의 후손으로 남창에서 은거했던 인물이다. 명나라가 망하자 성과 이름을 감추고 살았는데, 청나라 초기의 4대 화승(畵僧)으로 유명하며, 시내에 기념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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