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길목에서
봄이 오는 길목에서
  • 문틈/시인
  • 승인 2013.03.13 19: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겨울의 모진 추위를 견뎌낸 가로수들이 목마른 기다림의 자세로 줄지어 서 있다. 나도 고백하자면 시방 저 나무들처럼 봄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날마다 맨손으로 공기를 만져보며 음, 아주 한결 부드러운 것 같은데, 하고 멀리서 다가오는 봄기운을 느낀다.
어디를 보아도 아직 푸른 봄빛은 눈에 뜨이지 않건만 나무들은 벌써 깊은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듯하다. 봄이 몇 걸음 저기서 야, 은행나무야, 나 왔다, 하고 소리쳐 부른다면 금방이라도 키 큰 나무들은 눈들을 뜰 것만 같다.

나는 봄이 와서 산과 들에 나무와 풀과 길섶에 연초록 물감을 칠할 그 날을 기다린다. 그때는 내 혈관에 흐르는 피도 더욱 힘차게 흐를 것이다.
내가 이 도시에 사는 거주자들 중 누구보다도 먼저 봄의 세례를 받고 싶어 날마다 들떠서 교외로 나가는 것을 보며 아내는 나이가 들면 봄을 더욱 그리워하게 되는 법이라며 뜬금없는 나이타박을 한다. 내가 늙어가는 징조란다. 저 푸른 하늘을 보라고, 하늘이 부드러운 융단 같잖아, 하고 어느 틈에서라도 애써 봄빛을 발견하려는 나에게 그 무슨 망발! 당신은 나이가 들어가느라 그렇다니 하는 그런 말을 들으면 당최 억울한 느낌이다.

나이탓이 아니라 내가 우주와 자연의 아주 작은 일부로서 봄의 생기를 얻으려는 생명의 원초적인 욕구라고 나는 믿는다. 누구 말처럼 사람이 살면서 대체 일생에 몇 번이나 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봄은 겨울의 잉태 끝에 응아, 하고 아이를 낳듯 만물의 재생을 출산하는 계절이다. 다시 태어나는 부활의 때인 것이다.
이 봄에 나도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 잊어버린 초심을 회복하여 봄의 가족이 되고 싶다. 정말이지 새봄이 오면 나는 처음 맞이하는 신부를 대하듯 사랑의 마음으로 봄을 껴안아주고 새봄이 쓰고 온 면사포를 조심스레 벗기고 입맞춤을 해주고 싶다. 그리하여 봄과 한몸이 되고 싶다.

내가 봄과 한 몸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먼저 눈빛에 생기가 돌 것이다. 머리숱도 더 나고 더 검어질 것이고, 피부도 탄력이 생길 것이다. 목소리도 맑아질 것이고, 작은 소리도 더 잘 들릴 것이다. 심장도 더 힘차게 뛸 것이다. 봄은 믿는 대로 이루어지는 계절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봄이 먼 가을열매를 믿고 꽃을 피우겠는가. 나는 그렇게 진심으로 상상한다.
무엇보다 나는 재생한 만물이 내게로 다가오는 기적을 보게 될 것이다. 창세기 첫날처럼 말이다. 이것은 기적이다! 사람은 일생에 몇 번이나 기적을 보게 될까. 봄은 도처에서 기적을 보여준다. 만일 당신이 이제 나도 늙었어, 하고 아내한테 오래된 결혼사진을 꺼내보듯 넋두리할 때가 있다면 봄이 회고풍의 추억을 되살리러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겨둘 일이다.

봄이 무엇 하러 해마다 오는가. 봄이 오는 까닭이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무슨 수수께끼가 아니다. 만물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대자연의 법칙, 즉 우주의 은총인 것이다. 내가 은총을 입으면 나도 봄이라고 하는 재생의 기적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니 내게 몇 살이나 먹었소, 하고 묻지 말라. 그런 것은 봄에게 물어볼 일이다. 봄한테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일 모레쯤 담장 밑에서 푸른 봄이 꿈틀거릴 것이다. 잘 지켜 볼 일이다. 봄이 와서 너와 나에게 무슨 일을 할지, 생각만 해도 온몸이 전율한다. 봄은 누구에게든 해마다 일생에 처음으로 오는 것이기에.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