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야기 61 천태종(天台宗)의 본산 국청사(國淸寺)
중국이야기 61 천태종(天台宗)의 본산 국청사(國淸寺)
  • 강원구 한중문화교류회 회장
  • 승인 2012.12.27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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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구 박사

절강성 항주에서 소흥 가기 전의 농촌 풍경은 마치 도시와 같은 건물들이 즐비하다. 집들이 2층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3층 4층 주택들이 우리나라 농촌에 있는 여관 건물 크기만 하다.
중국의 농촌이 눈부시게 발전하여 잘 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간혹 연변 지방의 농촌을 중국 농촌의 오늘의 모습으로 이해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발전된 중국 농촌의 현실에 깜짝 놀라게 된다.

소흥을 지나 천태현에 들어가면 아주 한적한 시골 풍경이 나온다. 아직 경지 정리가 되지 않은 높은 산의 다락 논은 필리핀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과 비슷하다. 중국 어느 곳이나 개발의 붐이 많이 일고 있는데, 천태현 역시 도로를 내고 도시를 새롭게 건설하고 있다.

천태현에는 천태산과 국청사(國淸寺)가 유명하다. 국청사는 서기 598년에 수나라 때 시작해 601년에 완공된 절로 한국과 일본 불교의 천태종의 본산지이다. 국청사가 세워질 무렵 고구려 승려 바야(波若)는 남진(南陳) 시기 중국에 갔다.
수나라가 진나라를 멸망시킨 후 금릉(金陵)을 떠나 천태산에 들어가 지의(智顗)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불법을 전수 받았다. 그의 스승은 그에게 천태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서 두타행(頭陀行)을 수련하도록 했다. 이에 바야가 산봉우리에서 16년간 수행한 다음 613년 자신의 수명이 다 되어 가는 것을 느끼고 하산하여 국청사로 내려갔다.

바야는 국청사에서 승려들과 하산 인사를 한 후 며칠이 지난 다음 아무런 통보도 없이 국청사에서 적멸(寂滅)하였다. 그는 천태종을 고구려에 전래시키지는 못했지만, 그의 행적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천태종을 창시한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고려 11대 문종(文宗)의 넷째 아들로 의천은 1085년 31세에 문종과 인예왕후 몰래 송나라 상선을 타고 산동반도를 거쳐 국청사에 들어가 수도를 닦은 후 2년 만에 돌아와 천태종을 창시하였다.

국청사 대웅전 앞에 있는 대향로는 건륭황제 때 만들어진 것으로 문화혁명 이후 주은래가 사찰 복원을 명령하면서 북경 자금성에 있던 것을 국청사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중국 4대 총림으로 추앙받고 있는 국청사 및 천태종의 역사와 기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국청사는 문화혁명 이후 복원된 제1호 사찰이다.
국청사는 회창의 법난(841~846년)을 비롯해 여러 차례 전란으로 훼손과 중건을 겪었다. 현재의 건물은 청나라 시대인 1723년 경 지어진 것이다.

국청사 내에는 한국에서 지은 절과 일본에서 지은 절이 나란히 있다. 한국의 절에는 천태종의 개창조인 지의대사와 고려 천태종의 문을 연 대각국사 의천 스님, 근대 한국 천태종 중창조인 상월원각대조사의 존상이 함께 모셔진 한중조사전이 있어 천태종의 발상지임과 동시에 한국과 중국 불교의 역사와 법맥이 같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국청사 내에는 1,500년이 넘는 매화나무가 있다. 몇 차례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죽었다 살아났다는 신비에 가까운 매화나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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