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으로 메일을 자주 쓰는 편이다. 그런데 가끔 메일 계정의 비밀번호를 바꾸라는 권유문자가 뜰 때가 있다. 동일한 비밀번호를 오래 사용했으니 바꾸라는 통지다. 그래도 이런 친절한 통지문이 나는 되게 귀찮다. 은행에서도 같은 식으로 계좌비밀번호를 바꾸라고 권유한다. 이것 역시 내게는 너무 성가시다.
오래 쓰던 비밀번호를 바꾸면 새 비밀번호를 내가 곧잘 잊어먹기 때문이다. 헤아려 보면 비밀번호를 쓰는 곳이 한둘이 아니다. 인터넷상의 이용 사이트, 거래 금융기관들까지 셈하면 대체 몇 군데나 될지 모른다. 비밀번호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선 아파트 집 현관문의 디지털 키에도 비밀번호를 눌러야 하고, 어떤 아파트는 아예 그 동에 들어갈 때부터 비밀번호를 눌러야 한다.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켤 때도 비밀번호를 눌러야 쨍하고 열린다. 일상생활에서 비밀번호를 대야 하는 일이 내게는 정말이지 무척 번거롭다.
가장 번거로운 것은 은행이나 보험회사, 병원, 증권회사, 통신사 같은 데 볼 일이 있어 전화를 걸면 으레 “주민등록번호를 눌러 주십시오”라는 멘트가 나온다. 이 주민번호라는 것도 일종의 개인 비밀번호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주민번호를 한참 누르고 나면 “이 전화는 녹음되고 있습니다” 어쩌고 나오면서 성질 급한 사람을 자지러지게 만든다.
내가 알아야 하는 내 비밀번호는 대체 몇 가지나 되는지 모르겠다. 한번은 급한 일로 은행에 갔는데 비밀번호가 영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다섯 번이나 댔는데도 비밀번호가 틀리다고 나온다. 팔짝 뛰고 고꾸라질 일이었다. 결국 주민등록증을 가져와서 다시 서류양식을 쓰고서야 새 비밀번호를 만들어 볼일을 처리했다.
어쩌면 나 같은 경우는 비밀번호 갯수가 적은 편에 속할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일을 보려면 비밀번호를 요구하는 곳이 너무나 많다. 다른 사람들은 그 많은 비밀번호를 잘들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비밀번호나 주민번호를 대라고 할 때 짜증이 안나는지, 나는 그것이 참 궁금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비밀번호들로 꽉 잠궈 있다. 아니, 우리 뇌 속은 온통 자기만 알아야 할 비밀번호로 가득하다.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하자면 비밀번호를 요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가령 증권사에 전화를 걸었다면 몇 번을 눌러라, 누르면 또 몇 번을 눌러라. 거듭되는 버튼 누르기 과정을 거치느라 진이 다 빠질 지경이다.
그런데 그 비밀번호라는 것이 정말로 안전한 것일까. 공연히 이용자만 번거롭게 하는 것은 아닐까. 인터넷상이라면 비밀번호의 기능은 제한적이다. 해커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개인의 비밀, 예컨대 이메일이나 은행구좌를 쫙 다 들여다보고 있다. 내가 아무리 비밀스런 이야기를 이메일로 전한들 그 내용을 다 읽고 있는 빅 브라더가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몇 달마다 자주 바꾸라는 그 비밀번호라는 것이 사실상 형식요건에 그치는 일이 많다는 말이다. 웬만한 일이면 비밀번호를 대지 않아도 될 일을 죄다 비밀번호를 요구한다. 그리고 제발 그 ‘이 전화는 녹음되고 있습니다’는 소리도 작작했으면 좋겠다. 뭐, 국민을 범죄자로 취급하는 듯해서 불쾌하기 그지없다.
물론 사생활은 엄격히 보호되어야 할 것이지만 말이다. 일거수일투족에 비밀번호를 요구한다면 도대체 편리한 IT세상 어쩌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우리는 곳곳에 비밀번호라는 가시넝쿨을 쳐놓고 살고 있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