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야기 51 구국의 영웅, 악비(岳飛)는 왜 추락하고 있는가
중국이야기 51 구국의 영웅, 악비(岳飛)는 왜 추락하고 있는가
  • 강원구 한중문화교류회 회장
  • 승인 2012.10.18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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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의 여진족 금나라에 수도 개봉을 함락당하고 남쪽으로 도망해 겨우 살아남은 남송 왕조에서 끝까지 무력 투쟁을 주장하며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악비(岳飛.1103~1142). 이런 그를 일반 중국인뿐만 아니라 중국의 역사가들도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했다.
악비는 남송 시대 중원을 침공한 금나라 군에 대항한 한족 장군이다. 우리나라의 이순신같은 한족의 민족 영웅 쯤 된다고 하겠다. 외세 민족에 침입에 항거하여 한족을 지키기 위해 충절하나 우매한 남송 황제 고종과 재상 진회에 의해 모함을 받고 39세의 젊은 나이로 죽는다. 마치 임진왜란 때 우군 선조와 간신 원균을 지탄하고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는 정서와 닮아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런 역사 인식은 1980년대 이후 중국이 '다민족국가론'을 공식 채택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한다. 2009년도 동북아역사재단의 공동연구과제의 결과물로 최근 단행본으로 발간된 '동북아 중세의 한족과 북방민족'에서 악비에 대한 역사평가가 언제, 어떻게, 그리고 왜 달라졌는지를 점검했다.
이런 변화가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역사가가 장박천(張博泉)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금나라 역사에 대한 각종 논문과 저서를 쏟아낸 그는 '중화일체론'에 따라 금나라 역사 또한 중국 국내사의 일부로 파악했다.

그는 중화(中華)를 귀하게 여기고 이적(夷狄)을 천하게 보는 차별의식을 '봉건적'이라고 비판한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이런 역사의식을 '반동적 민족분열사상'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런 장박천에게 송과 금나라의 대립은 중국과 이민족의 대립이 아니라 중국 내부의 대립인 내전이 되며 악비가 중국 민족을 구한 영웅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가 악비를 폄훼하지는 않았다. 그는 금나라 진영에서 강경파 주전(主戰) 인물인 김올출(金兀朮: 아골타의 4째 아들, 아골타는 신라의 후손이라고도 한다)과 악비를 한데 묶어 두 왕조 투쟁에서 모두 자신의 재능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중화민족 역사상 칭찬할 인물이라고 치켜세웠다. 다만 구국의 영웅에서는 한발 물러난 셈이다.

중국 역사학계에서 1950년대 이래 막강한 위세를 누린 유물사관이 퇴색하고 중국 역사 주체가 한족이 아니라 55개 소수민족을 포함한 중화민족 '다원일체론'에 근거한 '애국주의'가 그 자리를 차지한 점을 가장 큰 특징으로 꼽았다.
악비의 사당이 있는 항주에서 1988년 1집이 나온 '악비연구'(岳飛硏究)의 경우 1996년까지 발행된 제4집까지만 해도 악비를 민족영웅으로 인식하는 논문이 절대다수였지만, 이후 중국 당국의 다민족일체론이 강화되면서 학술지 자체가 거의 10년 동안 발행이 중단됐는가 하면, 이후 논문집에는 아예 악비를 다룬 논문 자체가 거의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원로 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악비를 여전히 구국의 영웅으로 간주하는 경향은 존재하지만 악비의 위상에 많은 변화가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악비가 쓴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출사표(出師表)’는 사천성 성도(成都)의 제갈공명을 모신 사당인 무후사(武侯祠) 입구에 커다랗게 쓰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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