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를 주우면서 든 생각
도토리를 주우면서 든 생각
  • 문틈 시인
  • 승인 2012.09.27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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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뒷산으로 가는 길가엔 상수리나무들이 양 옆에 줄지어 서있다. 9월도 하순을 넘어서는 이맘때면 상수리나무들은 몸을 흔들어 도토리들을 떨군다. 누가 건들지 않아도 도토리들은 톡, 톡, 길바닥에 떨어진다. 나는 뒷산으로 가는 산행을 잠시 멈추고 바닥에 떨어지는 도토리들을 한 알씩 허리 굽혀 줍는다.

도토리는 땅에 떨어질 때 작고 앙증맞은 제 몸집크기만한 소리를 낸다. 톡-. 흡사 자기를 봄가을 키워준 대지에 감사의 뜻을 표하는 듯한 소리다. 대지만 겨우 알아들을 것 같은 아주 미미한 소리.

도토리는 대개 상수리나무 가지에서 떨어질 때 자기를 감싸고 받쳐준 소쿠리 모양의 도토리받침을 분리하고 맨몸으로 따로 떨어진다. 도토리받침은 도토리와 갈라져 저만치 풀썩 낙하한다. 도토리받침은 도토리가 땅에 떨어질 때 충격을 덜 받도록 같이 땅에 떨어졌다가 분리되고 도토리만 옷을 벗듯 따로 떨어져 나오는 놈도 있다.

그렇게 보면 도토리받침은 도토리가 땅에 떨어질 때 몸피가 다치지 않도록 배려된 모양새다. 자연의 저 세심한 손길이라니…. 도토리는 포장된 땅에 떨어졌다가 자체 반동에 의하여 한 번 더 공중으로 뛰어오른 다음 다시 땅에 떨어져 구른다.

톡, 톡, 톡, 여기저기서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들이 내 귀를 이렇게 기껍게 하디니. 나는 산행을 잊고 지난 여름의 비바람과 폭풍을 견뎌온 상수리나무의 결실이 벌이는 잔치판을 더 지켜보기로 한다. 가만 보니 도토리들은 따가운 가을햇살이 몸을 간질이는 통에 참지 못하고 지레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햇볕이 비치는 쪽의 상수리나무들 쪽에서 더 많은 도토리들이 떨어지고 있다. 한번은 저 쪽으로 떨어져 굴러가는 도토리를 보고 걸음을 옮기다가 그 도토리를 쫓아 날아온 꽁지가 푸른 새 한 마리와 맞닥뜨렸다. 아마 주위 어느 나무에 앉아 있다가 도토리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날아온 모양이다.

나는 순간 새에게 도토리를 양보하려고 물러섰는데 내 동작이 너무 컸던지 새는 도토리를 포기하고 그냥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순간 새한테 살짝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본디 이 도토리들은 뒷산에 사는 다람쥐, 청설모, 그리고 새들의 먹을거리여야 맞을 것이다. 내가 주워서는 안될 것이었다.

이런 생각으로 나는 좀 복잡한 심사가 되었다. 그럴 것이 주위를 보니 검은 비닐봉지를 하나씩 들고 본격적으로 도토리를 주우러 다니는 도토리 줍는 전문꾼들이 여럿 보였다. 그 무리 중에 내가 들어 있는 셈이 된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내가 도토리를 줍는 것은 집에 가지고 가서 무슨 도토리묵을 해먹자고 한 것도 아니고, 자동차와 사람들이 다니는 이 길바닥에 떨어진 도토리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저 사람들이 다 주워가 버리는 것보다는 내가 뒷산 다람쥐 길목에 놓아주거나 산에 사는 '식구'들을 위해 함부로 뿌려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금 남겨 두었다가 싹을 틔워서 그것을 뒷산에 심어볼 요량이었다.

상수리나무는 도토리만 떨구는 것이 아니다. 가을바람에 갈잎들이 내는 소리의 소슬함, 그리고 낙엽이 되어 떨어질 때의 조락의 풍경. 나 같은 소심한 인간에게 상수리나무의 한해는 시 열 편보다 더한 깊은 감동을 남겨준다. 상수리나무는 종당에 그야말로 무소유를 실천하는 것이다. 한해를 풍성하게 마친 상수리나무에 경의를 바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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