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호남교육의 실체
조선시대, 호남교육의 실체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2.09.20 08: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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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촌 거주 유학 지식인 향촌교화활동 수행

조선시대 호남지역에서는 어떠한 교육체계로 문인들을 길러냈을까?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이사장 문병란)이 지난 19일 광주교대 교육매체관에서 조선시대 호남교육의 실상과 위상이라는 주제로 제 7회 학술 심포지움을 개최했다.

이날 첫 번째 발표로는 안동교 조선대학교 고전번역센터 연구원의 ‘하서 김인후의 강학활동과 훈몽재’에 이어 김대식 조선대학교 교육학과 교수의 ‘목미암과 향촌지식인의 역할’, 마지막으로 김봉곤 순천대학교 HK연구교수의 ‘존재 위백규의 향촌교화과 장천재’라는 주제발표가 있었다.

훈몽재에 이어 백화정까지

▲안동교 조선대학교 고전번역센터 연구원
먼저 하서 김인후의 강학활동에 대한 이야기로 발표를 시작했다. 조선조 중기에 호남 장성에서 태어난 김인후 역시 ‘지적 거인’ 중의 한 사람으로 호남을 지역적 기반으로 삼아 학문 활동을 전개하면서 다수의 문인들을 양성했다.

안 연구원은 “하지만 하서는 당시 사상계의 중추적인 인물이었으나 아직까지 교사로서의 강학활동과 공간이 깊이 있게 탐색되지 못해 정리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고 설명했다.

하서는 39세 순창으로 들어가 점암촌에 서재 훈몽재를 짓고 인종의 승하와 외척들에 의해 정치가 농단되는 현실의 시름을 달래면서 후학양성에 주력했다. 그러나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과 간곡한 유언 때문에 김인후는 순창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장성 맥동으로 돌아가게 됐다.

하서는 맥동에 ‘백화정’에서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적극적으로 표명하여 성리학 체계를 정립하는 한편, 몰려드는 문인들을 위해 심혈을 기울렸다고 한다. 안 연구원은 “훈몽재의 학규는 지금까지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면서 “하지만 ·하서가 포부를 지니고 강학을 시작했다기보다는 멀리서 배우기 위해 찾아온 문인들에게 필요한 교육을 자연스럽게 펼쳤을 것이라다”고 평가하고 있다.

개방적인 형태의 목미암

▲김대식 조선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다음으로 김대식 교수가 죽산안씨 문중의 향촌교화를 목미암을 중심으로 발제를 이어나갔다. 전남 순천 소재의 목미암은 은봉 안방준의 증손 안후상이 지은 서재로 죽산안씨 문중의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김 교수는 “목미암은 문중 자제들에 한정된 교육시설에 머물지 않고 문중 이외의 인물들에게 개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며 “이는 자기 문중의 이익만이 아니라 향촌 교화라는 지역공동체의 공동선을 위한 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고 설명했다.

이후 중수과정에서 안창훈은 독자적인 학규인 ‘상관재학규’를 제정했다. 상관재에 속한 생도들은 “서당에서 함께 공부하는 우리들은 힘껏 배우고 몸을 가다듬어, 서로 학문을 권장하고 경계하여 날마다 새롭고 또 새로워져야 한다”고 반복해 읽었다고 한다.

그 당시부터 동료과 함께 공부를 해가면서 동료들 간에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는 노력을 했다는 전통을 엿볼 수가 있다.

또한 목미암에서는 향음주례 등 의례의 시행으로 향촌교화 활동에 참여하는 양상을 나타냈다고 한다. 이를 참여함으로써 지역민들은 장유유서로 대표되는 유학적 가치를 경험할 수 있었다.

▲김봉곤 순천대학교 HK연구교수
장천재, 향음주례와 향촌교육활동

끝으로 김봉곤 순천대학교 HK연구교수의 존재 위백규의 향촌교화채과 장천재 발제로 발표를 마무리 했다. 종합 토론에 참석한 김덕진 광주교육대 역사문화교육연구소장은 “장천재에 대한 연구는 이 논문이 최초가 아닐까 싶다”며 “장천재의 17가지 학규는 아직도 후손들이 지켜가고 있는 것 같다”고 보충했다.

위백규는 스승인 윤봉구로부터 인물성 이론과 기질변화에 대한 중요성을 교육받았으며 농사와 학문에 힘쓰고 효제충신의 도리를 다하는 교육론을 형성했다. 김 연구교수는 “이는 사람의 재질이나 편벽됨은 학문을 통해 극복할 수 없다고 하여 후일 강학 활동이나 향음주례나 향사례 등을 자주 여는 사상적 근원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위백규의 향촌교육활동은 장천재의 교육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후 장천재는 일대의 학문과 시회의 중심지가 되면서 조선조 말 크게 문풍이 일어나고,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아져 많은 인물이 다녀간 명소가 됐다는 장소로 남았다.

한편 종합토론에 권수용 조선대 한국학자료센터 연구원은 “호남만의 문인전통을 쭉 연대적으로 작성하는 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연구이다”며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서라도 호남학 정립이 되는데 쉬울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종합토론에 참석한 광주교대 김덕진 역사문화교육연구소장과 박연호 교수는 “조선시대에는 공적인 형태의 서당과 집안에서 같이 가르치자 해서 만들어진 형태의 서당이 있는데 목미암은 그 중간 형태인듯 하다”며 “지역민을 위해 지역적 기반을 함께하고 문중에서 새로운 기반을 만들었다”고 덧붙였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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