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역사기행 2> 의사 박문용
<근현대역사기행 2> 의사 박문용
  • 정인서 기자
  • 승인 2012.08.02 18: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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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피 이어받은 박문용 다시 日帝에 항거
면장 허송세월 떠나 독립운동 투신키로

김구선생 은거비 옆에는 나란히 다른 비가 서 있었다. 우리 일행들의 관심을 끌었다. ‘의사 박공문용 기적비(義士朴公文鎔紀跡碑)’였다. 김구 선생과 나란히 있는 의사 박문용은 누구인지 궁금했다. 일단 안내판에는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라는 표기가 있다. 조선대 이종범 교수의 해설이 이어졌다. 김구 선생과 함께 역사적인 삶을 함께 했다는 이야기였다.

하늘이 높다. 높은 만큼 햇볕은 살이 데일만큼 뜨거웠다. 하지만 박문용의 열정만큼이나 뜨겁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 교수의 설명에 모두들 귀를 쫑긋 세웠다. 뜨겁다는 생각은 잠시 제쳐두었다.

임란 의병장 박광전 장군 11대손

이 비는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 10번지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앞장 선 의사 박문용(1882 ~ 1927)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2년 5월 건립되어 1996년 7월 쇠실쉼터로 옮겨진 것이다. 박문용은 조선총독부 사이또 총독을 저격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다.

1979년 2월 28일 전남일보(현 광주일보)에 ‘기미독립만세 60년만에 밝혀진 <제2의 독립선언>주역’이란 제목으로 한 의사 박문용이 소개됐다. 그리고 ‘묘소엔 碑하나 없어’, ‘부인 林여사 후손과 쓸쓸한 오막살이’ 등의 내용으로 독립운동가의 소외된 모습이 그려졌다.

그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문강공 박광전(1526-1597) 장군의 11대 손이다. 문강공은 김인후 기대승 유희춘 이일제와 함께 ‘호남의 5현’이라고 하는 조선의 큰 선비였다. 보성군 노동면 광곡리는 박광전 선생이 생전에 성리학을 공부하고 후학을 교육하면서 은거했던 유서깊은 곳이다. 훗날 후손들이 죽천 박광전의 유지를 기리기 위해 1948년께 죽천정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런 피를 이어받았을까? 박문용에게 다시 일제에 항거하는 기운이 살아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가난한 집안인지라 충분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9세 때 그가 갑자기 보이지 않게 되자 당시 마을에서는 행방불명되었다고 하였다. 그런 후 20여년이 지난 1911년, 그의 나이 30세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영어 일어 중국어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았다. 20여년 동안 대륙을 떠돌며 나름대로 신교육을 받았다고 하겠다. 오늘에도 이런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에 당시로서 4개 외국어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어서 마을에서 인기(?)를 얻을만 하다. 그는 고흥군에 있는 거금보통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2년 후인 1913년 보성군 복내면장에 취임하였다.

일제강점기 때의 면장은 대단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몇 달 뒤인 6월에 겸백면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박문용은 면장으로 시간을 보내기엔 ‘허송세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외로 나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하였다. 그는 1913년 12월 8일 겸백면 영수회계인(주사)이 거둔 300원과 자신이 직접 징수한 27원 6전의 세금 등 모두 327원 6전을 들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천진불변단에서 부단장으로 활동

그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박환(朴桓)이란 가명으로 활동했다. 3 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천진 프랑스 조계내에 ‘천진불변단(天津不變團)’이라는 독립운동단체가 생겨났다. 1919년 4월 18일이었다. 처음엔 불과 55명의 단원으로 출발했으나 이 후 참가자가 계속 늘었다. 박환도 참가하였다. 1919년 8월 15일 임원 개선 때 박환은 부단장 겸 의사부장이 되었다. 결성 당시 임원에 들지 않았던 그가 부단장이 된 것은 그가 조직내에서 주도적 역할로 자리를 잡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어 그는 1919년 10월 31일 대한민국대표 30인의 한 사람으로서 ‘제2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이 선언에는 박은식 김구 등을 비롯하여 명제세 등의 불변단 임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때 박문용은 김구와 연결되었다. 아마도 김구 선생이 보성에서 은거했었던 인연으로 6살 아래인 보성 출신 박문용과 남다른 정을 나누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선언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명의로 일본의 철수를 주장하였다는 점에 의의가 있었다. 박문용은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국내 특파원을 자임하였다. 임시정부의 국내 특파원의 임무는 각양각색이었다.

1919년에 파견된 특파원은 대개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계몽과 선전, 임시정부의 정치 계몽, 독립사상의 고취, 연통제 및 교통국의 설치, 국내 지도자와의 협의, 독립운동 단체의 조직, 정세 파악 등의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1920년 이후의 특파원은 연통제 및 교통국의 활동 상황을 시찰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박문용은 전라도 방면의 특파원이었다. 그는 국내로 들어와 경성부 정동 11번지에 잠입하였다. 박문용은 1919년 음12월에 한우석(韓禹錫, 1892~1950)을 만나 함께 상해로 가서 독립운동의 여러 유력자를 만났다. 이때 함평 신광의 일강(一江) 김철(金澈) 선생도 만나게 해주었다. 김철 선생 기념관도 이번 일정에 포함되는 곳이다.

이완용 송병준 등 암살 준비

박문용은 다시 경성으로 돌아와 1920년 음3월 15일에 한우석을 다시 만났다. 두 사람은 일제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을 짜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일단 조선독립군사령부(대한군정서)의 조직을 국내에 만들기로 하였다.

그 목표는 첫째가 병사를 모으는 일, 둘째는 조선총독과 이완용 송병준과 같은 친일파를 암살하는 결사암살단의 조직이었다. 그들은 1920년 8월 24일에 미국 의원단이 경성을 방문하는 때에 맞추어 경성역에 마중을 나오는 조선총독과 정무총감, 그리고 이완용 송병준을 암살하기로 하였다. 중국으로부터 총을 들여오고 실탄을 준비하였다. 20명의 결사단원이 합류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전원이 체포되었다. 박문용과 함께 체포된 사람은 김동순(金東淳), 한우석(韓禹錫), 이돈구(李敦九), 조만식(趙晩植), 명제세(明濟世), 김태원(金泰源) 등이었다. 박문용에게는 8년 전의 공금횡령 탈취의 죄목이 추가되었다. 그에게 7년형이 언도되었다.

그는 사식도 거절하면서 저항하였고, 고문과 구타 등으로 몸이 크게 병들었다. 1924년 병보석으로 풀려나 고향에 돌아왔지만 3년여 투병 끝에 1927년 7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46세의 일생을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낸 그는 겸백면 사곡리 초암산 기슭에 묻혔다. 그러나 기나긴 일제 치하에 점차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이러한 박문용의 공적은 그의 생질되는 조철환(당시 60세)씨에 의해 밝혀지고 또한 전남일보의 보도로 알려졌다. 1980년 8월 14일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그들의 피와 혼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그들을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부족하나마 나라사랑의 조그만 길인듯 싶었다./정인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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