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공동체와 윤리 (5)
삶과 공동체와 윤리 (5)
  • 이홍길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상임대표
  • 승인 2012.04.05 15: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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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길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상임대표
혼자 고립되어 살아온 사람은 없다.
로빈슨 크루소는 혼자 산 사람의 상징처럼 되었지만, 그도 이전에 살았던 사회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고 뒤에는 프라이데이라는 야만인 동반자가 있었다.

이웃과 함께 하는 공동체는 인간생존의 기본조건으로 사람들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와 그 가족 공동체 부락 공동체의 일원이었고 의미를 확대하다 보면 사회공동체 국가공동체의 일원이기도 하였다.

공동체는 개인의 생존을 보호하고 지탱해 주는 울타리로 그리스의 초기시민들은 도시공동체를 벗어나면 생존이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위에서 살핀 것은 공동체의 순기능에 초점을 맞춘 것이지만, 공동체의 부정적 기능 또한 역사에서 누누이 살필 수 있다. 자유로운 개성들을 제약하는 것을 넘어서 억압하기까지 하는 많은 공동체들을 우리들은 규지하고 있다.

가문의 이름으로 사회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심지어는 국가의 이름으로 인생을 억압하고 인권을 유린해 온 사례들을 일일이 헤아리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 할 정도다. 그러므로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선현들은 그들이 생존하고 있는 현존의 공동체 또는 사회와 다른 이상사회, 이상의 공동체를 꿈꾸거나 모색하거나 실천하고자 하였다.

플라톤은 일찍이 아틀란티스 제국을 언급했고 16세기에 토마스 모아를 필두로 많은 사상가들이 유토피아 또는 새로운 아틀란티스를 이야기했다. 완벽한 사회 또는 공동체를 뜻하는 유토피아가 아무데도 없다는 뜻이어서 이상향에 대한 사상가들의 비관을 확인하는 성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에 오웬 등에 의해서 뉴하모니 공동체, 신 거주지운동으로 나타났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동양에서 이상향의 선구는 예기의 大同사상이라 할 것이다. 큰 도가 행해지면 천하가 공유되며 현명한 사람과 능력 있는 사람을 뽑아 신의에 힘쓰고 화목하게 한다.

사람들은 자기 부모만 부모로 섬기지 아니하고 자기 자식만 보살피지 않는다. 노인들은 여생을 보낼 곳이 있고 장년들에겐 일자리가 있고 어린이는 보육되며 환과고독과 폐질자는 보호 양육된다. 남자는 직분이 있고 여자는 가정이 있다. 재화가 버려지는 것은 싫어하지만 자기의 소유를 감추지 않으며 힘이 자기로부터 나오지 않음을 부끄러워 하지만 자기만을 위해서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음모가 일어나지 않으며 도적이나 난이 발생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문을 잠그지 않는다. 한국 고대사의 팔조법금도 같은 차원의 이야기인데, 이러한 사회를 대동 사회라 불렀다. 이러한 사회가 가능할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로 하고, 그 이상을 답습하고 현실화하려는 욕구는 계속되었다.

유토피아가 「없는 장소」로 인식되는 것과는 다르게 동양에서는 꾸준히 추구되고 있음을 살필 수 있겠다. 신유학에 이르러 대동사상은 유교적으로 정형화된다. 송대의 사대부들은 천하의 인민들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모색하여 참된 사대부는 천하 사람들이 걱정하기 전에 먼저 걱정하고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한 후에 즐거워한다는 명제를 제시하여 유교사상을 선양하였다.

한국과 중국에서 시행된 향약도 그 실천의 하나였다. 유교적 가치를 구현한 성인들이 추앙받고 서민들이 제 몫을 차지하도록 해야 했다. 명대에 이루러 지행합일을 주장하는 왕양명의 제자 하심온은 그 스승이 제시한 대동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수백 명이 한 공동체를 이루어 천하일가의 이상을 실천하는 취화당 운동을 행하기도 하였는데 로비트 오웬의 실험보다 무려 240년이나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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