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틈>봄이 와서 저질러 놓은 것들
문틈>봄이 와서 저질러 놓은 것들
  • 문틈/시인
  • 승인 2012.04.04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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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가고 새봄이 왔다. 봄이 와도 살림살이에 바빠서 시큰둥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대체 몇 번이나 봄을 맞이하는지 생각해보면 어느 해 봄도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내기는 뭣하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될 성싶다.
잠시 일손을 놓고 얼어붙은 대지를 뚫고 연초록 풀잎들이 솟아오르고, 단단한 나무의 표피를 찢고 어린 속잎들이 아얏, 하고 터져 나오는 것을 보노라면 세상에 이런 선물도 따로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내가 무엇이관데 이렇게도 찬란한 계절이 바로 내 앞에 선물 보따리를 내려놓듯 온단 말인가. 한번 심호흡을 하고 나서 둘레에 눈길을 주어 볼 일이다. 
 

 먼저 들판에 샛노란 유채꽃들이 융단처럼 펼쳐진다. 벅벅 금방 색칠한 노란 페인트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이에 질 새라 개나리, 산수유의 노란 꽃들이 만발한다. 산수유는 핀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조용히 피는 듯 마는 듯 피어 있다. 부처님 미소처럼 그 모습이 웅숭깊다.
노란 꽃들에 이어서 연분홍 진달래가 산골짜기를 빨갛게 물들인다. 우리네 월출산, 무등산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는 곧이어 벚꽃, 백목련, 라일락, 쥐똥꽃들이 일제히 피어난다.

반평생 지금까지 내가 봐 온 바로는 봄은 노랑, 빨강, 하양 그렇게 꽃들을 피우는 것 같다. 도대체 그 많은 색색깔의 물감들을 땅 속 어디에 쟁여 두었다가 일시에 내뿜어내는지 도통 모를 일이다. 유전 대신 우리나라 땅에는 산에 들에 봄꽃들을 색칠할 대형 물감 유전들이 곳곳에 있나보다. 온갖 꽃들이 피어나자 공기는 은은한 봄 향기로 살랑댄다.
아무리 아름다운 열아홉 처녀의 머리칼 내음이라도 이 봄꽃들에는 비교할 수 없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하릴없이 이 수수만만 꽃송이들을 한번 헤아려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내가 조물주라면 꿀벌들을 보내 이 땅의 모든 꽃들을 한 송이도 빠짐없이 날마다 헤아려보게 할 터인데, 나는 그저 작은 감탄사들만을 발할 뿐이다.
너 참 아름답다, 너 이쁘다, 너 사랑스럽다, 라고. 이 땅의 봄꽃

에게 일일이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내가 이렇게 쏟아낸 감탄사들은 아, 몇 가마니가 될지 모른다.
난 누구처럼 봄이 짧은 것을 한탄하거나 아쉬워하지 않는다. 사실 봄은 책의 표지처럼 슬쩍 내보이고는 곧 여름이라는 본문으로 들어가고 만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는 이웃들에게 아무리 사는 것이 고달프고 바쁘더라도 이 짧은 봄 풍경을 눈에 담아두라고 성가시게 한다.
봄을 보고 있으면 두 눈으로 천지의 생기가 들어차는 듯하다. 시골 처자들이 봄에 나물 캐러가는 것이 뭐, 꼭 저녁반찬거리를 마련하려는 것만은 절대 아니다. 온 몸에 봄기운을 받으러 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처자들은 바로 우리나라의 봄 풍경이 되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상춘곡을 지어 봄을 노래하고, 즐겼다. 승용차에 온가족을 싣고 배기가스 뿡뿡 내뿜으며 멀리 가서 시끌사끌 고기를 구워먹을 것이 아니라 주변 들판이나 언덕에 올라가 봄이 저질러 놓은 것들을 보라. 그리고 봄노래 한 곡쯤 흥얼거려 보면 어떨까. 봄이라는 말에는 (무엇을) ‘본다’(see)는 말이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봄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삶의 아름다움들을 발견하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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