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가는 다리 8
시간을 뛰어넘는 타임머신이 거기에 있더라
멀리 가는 다리 8
시간을 뛰어넘는 타임머신이 거기에 있더라
  • 윤영숙 기자
  • 승인 2011.10.28 16: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함평 고막다리와 보령 한내돌다리

가는 곳마다 꽃바람이 분다. 가을이 되니 역시 꽃이 제격이다. 함평은 지금 국향대전(10.28~11.13)이 열리고 있다. 봄에는 나비, 가을엔 국화향기 가득하다. 또 단풍이 물들어 세상천지를 붉게 만드는 보령의 성주산단풍축제가 10월 29일 열린다.
가을이 되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나온다. 어디로 떠나볼까? 시간을 거슬러 세상을 다시 보는 방법은 아직 없지만 마음만은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 전기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두 다리를 찾았다.

‘국화가 만드는 세상! 아름다운 함평천지!’를 주제로 열리는 함평 국향대전은 축제가 열리는 중앙광장에 국화 30만주와 억새 등을 이용해 ‘시크릿가든’성을 만들고 용, 돌고래 등 소형 국화조형물 20여 점을 조성해 볼거리가 제법이다.
이런 함평을 부를 때면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있다. 바로 ‘함평천지’이다. 함평의 모양새를 가리키는 이 말은 호남 각 고을의 특성을 읊은 노래 ‘호남가’의 첫 머리다. ‘함평천지, 늙은 몸이….’라는 판소리 단가에 등장한다. 함평, 광주, 해남, 제주 등 호남지방 54 곳의 지명을 넣어 문장 식으로 엮은 것이 이채롭다.
원래의 작자와 창작 시기는 알 수 없다. 구전(口傳)되어 오던 노래를 19세기 중엽에 신재효(申在孝)가 고쳐 지은 것이 사본으로 전해지고 있고, 또 8~9 종류의 이본이 있다. 일설에는 이서구(李書九)가 원작자라고도 하나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고 한다.

함평에 들어서는 초입에 나비도 보이고 장수풍뎅이도 보인다. ‘함평천지한우’라는 간판도 보인다. 함평은 1999년 첫선을 보인 ‘나비’를 통해 함평의 미래를 여는 밑천을 만들었다. 13년째 ‘전국 1위 축제’가 되었다. 대기업 총수들까지 매년 달려와 ‘친환경 경영’을 한수씩 배우고 갈 정도로 함평은 저만치 달려가는 농촌으로 변신하고 있다고 한다.
‘나비축제’를 국제적 행사로 키운 것이 ‘2008 함평 세계나비곤충엑스포’였다. 그해 4월18일부터 45일간 열린 행사에는 국내외 관람객 200만명이 다녀가는 성황을 이뤘다. 함평군은 현재 2013년 두 번째 행사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나비축제는 매년 입장료 수입만 20억원 이상을 올리는 것은 물론 500억원대의 부수효과도 거둔다고 한다.

고려시대 널다리 원형 보존

이곳 함평에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전해오는 널다리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함평의 영산강 지류 고막천(古幕川)을 동서로 가로지른 돌다리, 고막천석교가 그 주인공이다. 보물 제1372호로 지정되어 있어 한껏 기대를 갖고 찾아갔다.
네비게이션에 고막천석교(고막리 629)를 입력하면 낭랑한 목소리로 길을 잘 안내해주는 ‘여자친구’가 나온다. 안내해준 곳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엉뚱한 곳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 없었다. 그곳에도 내가 흘러 다리가 있을법해서 힘들게 돌아다녔으나 다리는 없었다. “다리가 사라졌나라”는 의구심을 가졌다. 이상하다싶어 되돌아나와 마을 주민에게 물었다. 그곳에서 3~4㎞나 떨어진 장소가 전혀 다른 곳이었다.

백제 무왕 때 조성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 최대 최고의 석탑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 진정한 가치는 목탑 형식을 빌어 만든 석탑이라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막천석교도 바로 나무다리의 형식을 빌어 만든 돌다리다.
이 다리는 고려 원종 15년(1274)에 무안 승달산 법천사(法泉寺)의 고막대사가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하룻밤에 도술로 놓았다는 얘기가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고막다리라 부르기도 한다.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 등 몇몇 문헌에 고막교(古幕橋)라는 기록만 나타날 뿐 누가 언제 축조했는지 등은 언급되지 않았다.

고막천석교라는 문화재 명칭보다는 고막다리가 훨씬 재미있다. 어려운 한자를 풀어서 기술하는 것이 학계의 추세인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다. 대한민국에 고막다리는 이곳에만 있는 것이니, 그리 부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몸은 함평에 땅은 나주에

과거에 함평에서 나주나 영산포 등지로 통하는 옛길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1910년대까지도 이곳에는 100석을 실을 수 있는 범선이 출입했고 자주 젓갈을 실었던 배도 들어왔다고 한다. 다리 언덕에는 4개의 빗돌이 세워져 있다. 고막원은 서쪽으로 학교면 마산리 청수원마을과 동쪽으로는 나주시 문평면 개계원을 연결하던 원터였다.
현재에서 과거로 가길 바란다면 고막다리를 권유한다. 다리를 건너는 순간 700년의 시간여행이 함께 이루어지는 실존하는 ‘타임머신’이다. 인근 주민들이 영산포로 떡 팔러 다니던 길목이었다 해서 ‘떡다리’ 혹은 ‘똑다리’로도 불렸으며, 다리 위를 걸을 때마다 상판의 윗돌이 움직여 ‘똑딱다리’라고도 했다.

함평군 학교면과 나주시 문평면의 경계를 잇는다. 마침 고막회관 앞에서 마을 이장 김동우씨(73)를 만났다. 김 이장은 “이 다리가 예전부터 그대로 있었는데 회관 쪽에 뚝을 쌓다보니 다리가 아래로 내려간 듯하다”면서 “여기 사는 사람들이 건너편 들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몸은 함평 사람이고 땅은 나주 땅이어서 예전엔 서류 한 번씩 뗄레면 들려야 할 곳이 많았다”고 말했다.
지난 2001년 이 다리를 완전 해체 보수하면서 교각과 교대 아래 나무 말뚝(41개 확인) 중 일부를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연대측정을 의뢰한 결과 최소한 고려말과 조선 초기인 서기 1390∼1495년(490±50)으로 축조시기를 확인하였다.

고막천 석교는 구름다리와는 달리 구조적으로 취약한 널다리형식으로 원래의 위치에 원형을 간직하고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유일의 다리이다. 마치 나무를 베어내듯 자유롭게 돌을 자르고 짜 맞춘 솜씨가 돋보이는 이 다리는 보기 드문 공법을 사용했으며, 석교가 지닌 교량사적 중요성을 지닌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물이 잘 넘치는 고막천의 물살을 7백 여년 동안 버텨온 견고미가 돗보이는데, 남도 지방에서 한양을 가려면 반드시 말 타고 이 다리를 건너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보수를 하면서 본래의 품격을 잃었다고 한다.

동학혁명 때 뜯었다 다시 복원

우리나라의 돌다리는 주로 무지개형인 홍교(무교각)와 교각을 가교하여 세운 평면교인 널다리 두 가지 형식이 있다. 고막천석교는 널다리이면서도 목조가구의 결구 수법인 주두의 가구법을 택한 것이 특징이다. 여기서 결구(結構)는 건축물을 이루는 각 부재를 짜맞추는 일 또는 그 짜임새이다. 가구(架構)란 건물의 뼈대, 즉 골조를 가리키는 것이다. 가구형식 또는 가구법은 이러한 뼈대를 짜맞추는 법식이라 말할 수 있다.
구조가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졌는데, 주춧돌을 물 가운데 놓고 다듬거나 모양을 내지 않은 화강암의 석재 4∼5개를 척척 포개어 5줄의 교각을 민흘림으로 세웠다. 사개형(四開形)의 결구와 멍에를 깔고 그 위에 깊고 짧은 쪽돌을 얹은 구조다.

사개형 결구는 기둥을 쓰지 않고 판재와 판재가 서로 맞물리도록 이를 내어 끼워 맞춰 마치 손가락을 맞물린 것처럼 짜여진 부위가 노출되는 기법으로, 몸체를 구성할 때 이 기법이 가장 튼튼하여 반닫이나 궤 등의 상자류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교각을 만들고 네모난 돌을 한두 개 받쳐 굄돌로 삼아 넙적한 돌을 얹어 노면(路面)을 만들고 양쪽 가장자리에 난간돌을 6개씩 놓았으며 그 사이에 두 줄로 빈틈없이 판석을 깔았다. 그 위에 다시 시렁돌을 올렸다. 이 돌은 노면보다 양쪽으로 50cm 가량 튀어나와 있어서 위에서 보면 마치 다리의 날개처럼 보인다.
다리 기초는 하상의 뻘에 지반 보강을 위해 생나무말뚝을 전 구간에 걸쳐 촘촘히 박아 이를 지지대로 하였고, 이 위에 큼지막한 장방형의 받침돌을 놓았으며, 그 주위로 일정 두께의 잡석을 깔았다. 받침돌 위에 거칠게 다듬은 장방형의 굄돌 두셋씩을 올려 교각을 형성했다. 정교하게 깔아 급류에도 휩쓸려 나가지 않도록 하여, 지금까지 홍수에도 견뎌온 가장 튼튼한 교량기초 구조를 보이고 있다.

다리의 길이는 20m이며, 폭은 3.5m, 높이는 2.5m이다. 초기 다리 길이는 현재의 2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학혁명 때 관군이 쳐들어오자 다리를 뜯어놓았다가 다시 복원하면서 축소됐다는 말이 전해진다.
동쪽으로는 돌로 쌓은 석축도로가 7∼8m 연결되고 특히 서측 가장자리 1경간은 수리 시에 우물마루를 널마루로 깔아 다양한 상판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물살을 가르기 위해 세운 최근의 콘크리트 다리가 이어졌다.

예전 벌교 홍교처럼 옛것 일부에 새것을 맞닿게 이어 新舊가 조우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벌교 홍교가 오늘날에도 다리 구실을 하며 정상적인 통로로 쓰이고 있는 데에 비해 이곳 고막천 석교는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다리’로서의 역할도 사실상 막을 내리고 박제된 유물로서만 남은 셈이다.
오랜 세월 동안 풍화로 돌이 깎이고 파였지만 지금도 이 다리는 마을에서 들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다. 마을에는 62가구 130여명이 살고 있다. 근처에 논일하러 가시는 몇몇 분들을 제외하고는 전혀 이용되지 않고 있다. 골동품처럼 놓고 보기만 하는 다리가 아니라 현재도 교량의 역할을 늠름하게 하고 있어 더욱 애정이 간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자료에서는 구조적인 위험성은 없으나 정기적인 모니터링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5형제 효성으로 만든 한내돌다리

대천 한내돌다리를 검색했더니 보령시가 나온다. “보령시, 우리나라 도시 이름 맞나?”라는 생각을 했다. 예전 보령군이 대천시와 통합되어 1995년에 보령시가 되었다. 이름이 바뀐 지 몇 년 되지 않아 미처 알지 못했다.
보령시는 몰라도 대천해수욕장은 많은 사람이 알 것이다. 몇 번 간 적이 있다. 결국 도시의 이름보다 해수욕장의 이름이 더 널리 알려져 있는 보령시는 충청남도 서해안에 맞닿아 있다.

한내돌다리가 위치한 곳은 보령 시내를 흐르는 대천천의 하천고수부지다. 무지개색 아치 모양의 동대교가 한내돌다리를 대신하며 가까운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보령시내 수청사거리에서 동대교 방향으로 향하다가 대천천의 하천고수부지 주차장으로 들어서면 된다. 대천천의 우리말 이름이 ‘한내’다.
동대교를 배경 삼아 이야기하면 왼쪽 마을에 사는 여인이 새벽에 한내천을 건너 마을을 오가는데 늘 치맛자락을 적시는 것을 안 힘 있고 효성스런 아들 5형제가 어머님을 위하여 다리를 놓아 드렸다는 설화가 깃들어있다.

지난 2009년 한내문학 19집(봄 여름호)에 실린 이문규의 시 ‘한내 돌다리’는 이 광경을 빗대어 오늘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주 먼 옛날 한내 뜰
강 줄기 건널 수 없어 헤맬 때
누런 구렁이 놓였네

농부들 맨발로 오가고
선비들 흙 묻은 짚신 신고 오가고
새색시 빨간 고무신 신고 오가고
신사는 검정구두 신고 오고 간

한내돌다리
당신 때문에 한내 뜰이 꽃 피고
당신 때문에 한내文學이 태동했네

당신이 산 증인이기에
짓밟히지 말고 여생 편히 보내시라
한내 천에 모셨네


박제된 유몰로 남은 옛 기억

처음에는 대천천을 가로지르는 돌다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는 박제된 유물처럼 고수부지 한 가운데 보관(?)되어 있었고 두 개의 안내판이 있었다. 원래 있던 자리에서 이곳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한다. 대천천변에 작은 연못을 파고 남아 있는 돌들을 이곳으로 옮겨 재구성한 것이다.
그런데 주변 정리가 너무 잘 되어 있었다. 잡초도 없고 풀들도 다듬어져 있었다. 다리 규모가 작아 생각보다 초라해보였지만 깨끗한 모습을 보니 오히려 우렁차 보이기도 했다. 보령시민들의 애정이 듬뿍 들어있었다. 인근 주민에게 물었더니 바로 지난주에 보령지역 문화재지킴이봉사단 20여명이 와서 일하고 갔다고 한다. 이런 분들이 있어 우리 문화재가 보존되고 후손에게 전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다리의 재질은 화강암이다. 인근 왕대산(王臺山)의 거대한 석재를 다듬어 큰 사리 때 뗏목으로 운반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옛날 저렇게 큰 돌을 어떻게 운반했을까라는 생각이 한편 들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전국에 걸쳐 화강암이 고루 분포하고 있다. 그래서 반영구적인 돌다리가 많이 가설되었다. 돌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한 징검다리에서부터 조선시대 다리 중 가장 긴 살곶이다리, 무지개 형식의 홍예 등 여러 방식의 다리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대천의 한내돌다리도 그런 돌다리의 역사를 증명해주는 다리다. 지금은 원형이 훼손된 모습으로 남아 있지만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한 다리였을 게다. 한내돌다리가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근대식 교량이 들어서면서부터다. 교통로의 역할을 잃어버린 돌다리는 사람들에게 잊혀져갔다.
1970년대 초까지 약 20m 정도가 붕괴되어 일부는 하천 제방 석축으로 사용되었다. 다행히 일부는 1976년 수습하여 대천읍사무소의 직원들이 옮겨 보존하였다가 1991년 12월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1992년에 충남유형문화재 제139호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우마차 통행

그렇다면 원래 이 다리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한내돌다리는 대천천 하류에 놓여 남포와 보령을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했다. 오서산(烏棲山)과 백월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에 따라 대천지역의 남과 북이 분리된 것을 연결하기 위해 축조되었다. 조선시대에 남포(藍浦), 비인(庇仁), 서천(舒川) 지역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놓여 있던 12칸 돌다리이다. 처음에는 재래의 나무다리였겠으나 후에 석교로 개축한 것이다.
여러 가지 문헌 기록으로 추정할 때 조선 전기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현재의 돌다리로 개축된 것은 1748년(영조 24) 이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기록에 의하면 설치 시기는 17세기 경으로 추정되며 다리의 규모는 폭 2.38m, 길이 50여m로 12칸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1978년에 교각이 처음 발견되었고 1991년 들어 매몰되었던 일부의 교각이 하상에서 드러났는데 그 길이는 약 27m였다. 하나의 검은 사암을 제외하면 모두가 화강암으로 다듬어진 교각이었다. 총 강폭을 상정하면 22간 정도 규모의 다리로 추정되나, 그간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12간으로 알려져 있다.
다리는 1.5∼2m 정도의 자연석 지대석을 묻고 그 위에 다듬은 받침돌 3단을 횡으로 쌓아 다리 기둥과 멍에를 대신하였다. 그런 다음 그 위에 길이 4∼4.5m, 폭 70∼90㎝, 두께 30∼40㎝ 정도의 다듬은 시렁돌 3개를 얹어 다리 바닥을 구성하였다.
멍에돌의 길이는 2.1∼3.1m였으며, 다리의 높이는 1.2m 정도로 복원되었다. 다리의 축조방법은 장축 길이가 0.3∼1m쯤 되는 비교적 크지 않은 굄돌을 모래 자갈층에 묻고, 그 위에 폭 2.4∼3.1m 정도의 거칠게 다듬은 화강암을 3층으로 포개어 멍에돌까지를 대신한 교각이 대부분이다. 모두 6개의 기둥이 불규칙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 위로 넓적한 판돌을 걸쳐서 다리를 완성하였다.

다리의 높이는 낮은 편이어서 바닷물이 밀려오거나 홍수가 질 때면 물에 잠기고, 보통 때에도 가끔 잠기었다 한다.『동국여지지』,『신안읍지』,『여지도서』등의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17세기 이전에 축조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양식은 함평의 고막천석교와 비슷하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우마차와 사람이 통행했던 길목이었다. 보령에서는 해마다 향토문화축제가 열리는데 이 때 12칸 돌다리밟기제(祭)와 돌다리밟기에 많은 시민이 참여하고 있다.
지난해 7월 폭우 때 수마가 할퀴고 간 한내돌다리를 본 문화재지킴이 임인식씨가 글을 남긴 것을 자료를 찾다가 발견했다. 2010년 7월 25일 작품이다.

한내돌다리 頌

천둥번개 스친 세월 여러 해지만
간밤엔 얼마나 무서웠을까

시뻘건 황토물이 삼켜 버린 온 몸뚱이
발피고(밟히고) 씻기고 이골이 나있었지

케케이 쌓인 시루떡 정성껏 올려놓고
손 비비며 무병장수 빌던 옛 내님이

어제구름 오늘구름 모두다 벗이지만
오늘따라 왠일인지 보고 싶고 만나고 싶구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