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가는 다리 3- 고흥의 虹橋와 鳳凰橋
멀리 가는 다리 3- 고흥의 虹橋와 鳳凰橋
  • 시민의소리
  • 승인 2011.09.27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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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로 가는 고을, 무지개 피고 봉황이 솟다

우주로 가는 길이 고흥에 있다. 하늘로 높이 솟아오른다는 뜻을 가진 고흥(高興)은 우리나라 우주시대를 열어갈 나로도 우주센터가 있다. 옛 사람들은 참 지명을 잘 짓는다. 어떻게 미래를 예견하고 그런 이름들을 짓는 것일까?
물론 이곳에서 우리의 꿈을 실은 나로호가 2번에 걸쳐 발사됐지만 모두 실패했다. 언젠가는 성공하리라 기대해본다. 한-러 간 나로호 2차 발사 실패 원인 규명과 상관없이 내년 8월경에 나로호 3차 발사를 강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고흥 읍내 여산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고흥천에 전설 속에 살아있는 홍교(虹橋)가 있다. 다리 밑이 무지개같이 반원형이 되도록 쌓은 다리 모양 때문에 무지개다리라고 부른다. 120여개의 조각돌로 짜 맞춘 홍교가 지금도 변함없이 보존되고 있다. 홍교는 홍예다리를 뜻하는데 분명 건축문화의 신기함을 나타내는 한 단면이다.
수박다리라 불리는 이 홍교는 수덕산과 마치산에서 기원되어 흐르는 하천의 수구 홍교로서 세종 때인 1441년, 약 570여 년 전 가설된 다리였으며, 오랜 세월을 지나고 1871년(고종 8년)에 새롭게 확장 보수된 다리로 추정된다.
이 홍교는 옥하리 홍교와 서문리 홍교가 있다. 이 두 곳의 다리가 함께 전남 유형문화재 제73호이다. 고흥읍 옥하리와 서문리 여산 마을을 흐르고 있는 너비 8 ~ 9m의 고흥천 위아래에 약 200m의 간격을 두고 있다.

▲ 1929년 동아일보에 실렸던 고흥 봉황산 모습
개보수 기록 제대로 없고 안내 부족해

처음 찾아간 곳은 옥하리 홍교이다. 고흥군청을 들러 위치를 파악한 뒤 정문 아래 사거리에서 오른편으로 꺾어 들어가니 불과 5분 거리도 안된다. 아무래도 도로에서 바로 보이기 때문에 가장 잘 알려진 홍교로 생각된다.
서문리 홍교는 그곳에서 복개된 도로를 따라 위쪽으로 가면 있다. 문제는 옥하리 홍교에서 서문리 홍교를 안내하는 표식이 없다. 있는 문화재를 자원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가져본다. 사전 지식이 없으면 옥하리 홍교만 보고 가버리기 십상이다.
그런데 옥하리 홍교는 근래에 보수되어 화강암 재질이 옛것과 새것의 모양이 그대로 그러나 신비스러움이 덜하다. 오히려 복개된 도로를 따라 위쪽 마을로 조금만 걸어가면 서문리 홍교가 규모는 좀 작으나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옥하리 홍교는 개울 바닥에 편단석을 깔고 그 위로 39개의 사각형돌을 차례로 맞추어 올라갔다. 3개의 장대석을 연결하여 한 줄로 하고 위아래가 서로 엇물리도록 배치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크기는 높이 4.2m, 길이 8.7m로 기록되어 있고 폭 3m쯤 되어 보인다.
홍예 주위로는 역시 잡석을 덮어 보호하고 있으며 홍예 바로 위에는 긴 장대석을 채우고 그 위로 다시 잡석을 쌓아 올렸다. 이곳은 용머리를 홍예 내부 중앙에서 돌출시켜 동쪽을 향하게 조각하였는데 눈망울이 뚜렷하며 입안에는 여의주를 머금고 있다.
인근 주민들이 이야기로는 12년 전쯤 개보수했고 최근 3~4년 전쯤 또 보수했다는 데 안내판에는 이런 개보수에 대한 기록이 없다. 눈으로 봐도 최근 개보수한 흔적이 뚜렷한 데 말이다.

홍교는 성벽 역할과 통로로 이용

서문리 홍교는 맨 밑에 편단석을 설치한 뒤 27개의 직사각형돌을 규칙적으로 쌓아 반원형의 홍예를 이루었는데, 한 줄은 1개의 장대석을 다른 한 줄은 2개의 장대석을 붙여 차례로 짜올라 갔다. 높이 2.9m, 길이 5.3m로 기록되어 있고 역시 폭은 2m 쯤이다.
홍예 주위로는 홍예를 보호하기 위하여 잡석을 채우고 그 중앙에 잘 다듬어진 직사각형돌을 덮어 통행에 따른 가중을 지탱하게 했다. 홍예의 서쪽으로 용머리를 조각하여 돌출시켰으며 반대편 동쪽에 용꼬리를 조각하였다.
자료를 찾아보니 서문리 홍교의 서향좌측 장대석에 해서체로 10행 48자의 음각 글씨가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동치십년신미사월일 서수구홍예창건 간역전오위장 송세호 호장 박승은 감관 박채익 색리 목경중 신일구 도소 배성중(同治十年辛未四月日 西水口虹霓創建 看役前五衛將 宋世浩 戶長 朴承殷 監官 朴彩翊 色吏 睦慶中 申日求 都召 裵聖中)>이라 하였다. 이 명문에 의하면 ‘동치’는 중국의 연호로 고종 8년(1871년)으로 기존의 홍교를 흥양읍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할 때 함께 수축한 것으로 보인다.
2개의 홍교에서 동일하게 나타난 현상은 홍예의 좌우에 직경 20cm가 조금 넘은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다. 다리를 쌓으면서 보조작업을 위해 그런 것인지 아니면 완성 후에 개울물의 수위를 조절하기 위한 나무보 거침대를 놓기 위한 것인지 확실치 않다.
한편 두 군데 홍교의 정상부가 모두 현재의 도로 평면보다 훨씬 높게 되었다. 이는 홍교가 흥양읍성의 마치산과 옥하리를 연결하는 성벽의 역할과 병사들의 이동통로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흥양읍성의 고지도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 옥하리 홍교는 최근 개보수되었으나 안내판에 기록되지 않는 등 관리가 소홀하다.


홍예 중앙에 용문석을 설치한 이유?

이 홍교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옛날 옛적에 난데없는 홍수로 고흥읍 시가지에 바닷물이 범람하여, 풍양 축두에 정박하고 있던 범선이 바닷물에 밀려 고흥의 주산인 주월산을 넘었다는 설화가 있다. 지금도 고흥과 두원을 사이에 두고 주월산이 우뚝 솟고 있다.
이 때 큰 홍수 피해를 입은 고흥 땅은 남쪽 조계산 밑으로 형성되고 있는 등암리를 기점으로 포두면 장수저수지 종점까지 길게 흘러 내려 장수천이 생겼고 그 후 남계천으로 개칭되었다. 당시 홍수로 피해가 극심한 백성들의 건강과 평온을 기원하기 위하여 어느 시절에 한 나라의 황후가 이곳 수덕산에서 백성의 안녕을 기도했다는 설화가 있다.
또 수덕산 한 약수터에서 발원하여 현 홍교다리와 연결하여 오색찬란하게 무지개가 펼쳐져 한때 이 무지개를 타고 선녀가 등천했다는 전설이다. 수덕산 옥녀봉에서 동남으로 내려다보면 북쪽에 고흥의 주산 주월산이 높이 솟아 있고 성인군자가 태어난다는 상서로운 봉황새가 복음자리를 잡았다는 봉황산 명산이 남쪽 조계산의 기운을 한 몸에 담아 자리 잡고 있다. 옛날이야기는 항상 신비롭다. 어쩌면 진짜 같기도 하고 또 얼토당토않은 것이 많다. 그러하기에 지금도 옛 이야기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자 손녀사이를 끊임없이 넘나들고 있다.
이 홍예의 전장에 용두석이 부착되어 있어 다른 지역의 수많은 홍교와 또 다른 특색이 있다. 옛 군주시대에 그 지역에서 정승이 배출되지 않으면 용문석을 부착할 수 없다는 법제가 있어 함부로 용문석을 설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용문석은 풍수지리설이나 토테미즘 등의 민간신앙의 산물이다. 이렇게 동물들을 새기는 것을 벽사시설(辟邪施設)이라고 한다. 다리의 안전과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 사악한 것들을 물리치려는 뜻이 있다.

무지개다리에서 소원 빌어 성취

따라서 고흥 땅에는 풍양면 한동(양리)에서 태생한 유비가 훗날 원나라 외교에 공이 많아 고흥 부원군에 봉해지고 최고의 벼슬로 알려진 도첨의(都僉議) 정승에 올라 이 용문석을 부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가만히 살펴 상상해보면 그런 신비스런 일이 있을 법도 하다.
그리고 몇 개의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옛날 옛적에 선녀들이 내려와 이 홍교 밑에서 목욕을 하고 수덕산에서 기원한 무지개를 타고 등천하는 꿈을 키워 소원 성취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전설에 따라 성안에 어느 가난한 선비의 아내가 있었는데 이른 새벽마다 서문 홍교 앞에서 옹달샘 물을 떠다 놓고 촛불을 밝히면서 100일 기도를 하여 남편이 무과시에 급제했다는 갸륵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내의 정성으로 무과에 급제한 그가 동방에 나르는 비장으로 이순신 장군 막하에서 큰 공을 세우는 장군이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한 며느리가 시아버님의 병환을 치유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약 뿌리를 구해 탕재로 만들어 이 홍교다리 밑에서 정성들여 공을 들여 약 2년간 용봉탕을 봉양했다. 그러한 정성이 헛되지 않고 하늘까지 감동시켜 57세 된 시아버지가 80세까지 건강하게 장수했다는 갸륵한 이야기도 있다.
▲ 서문리 홍교는 1871년에 만든 이들의 기록이 남아있다.


고흥군 자료관리 허술 보완해야

고흥읍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남계천이 있다. 이곳에 4개의 봉황교가 있다. 그 중에 역사가 오래된 다리는 제1봉황교로 지난 2007년 5월 21일 재가설되어 개통됐다. 제1봉황교는 고흥읍 상설재래시장과 연결되는 군청 소재지의 대표적인 교량이다. 일제강점기인 1943년에 가설돼 64년간 이용됐고 하루 평균 3천여 대의 차량과 5천여 명의 주민 등이 넘나들 만큼 가장 중심 다리였다.
그러나 다리가 협소하고 노후화되어 2006년 안전진단 결과 외장주형 균열 파손과 슬래브 하부 철근노출로 교량의 붕괴 위험이 있다는 판정을 받아 2007년 사업비 10억 원을 투입, 길이 27m, 폭 12m 규모로 재 가설된 것이다.
고흥군에 이전 다리의 역사를 알 수 있냐고 했더니 자료가 없더란다. 이전 다리의 규모도 문서보관실에 가야 찾을 수 있을는지 그것도 불확실하다고 했다. 여기저기 1봉황교 주변을 돌아다니며 서점과 약국 등을 들려 물어도 일제강점기 때 만든 오래된 다리였었다고 말할 뿐이다.
우연찮게 저녁식사를 하러 들린 홍화식당의 주인 신이엽씨에게 물었더니 “인근에 봉황산이 있는데 그래서 봉황교라 했다”고 말한다. 역사가 얼마나 됐냐고 물으니 역시 일제강점기 때 만들었던 다리였었다고 한다. 고흥의 (자칭)홍보대사인 주인 신씨는 마침 옆자리에서 식사를 하는 고흥의 청년(?)을 소개해준다. 정년퇴직하신 분이다.

뭐든 듬뿍 주는 고흥 인심에 감탄

그 분들을 통해 이곳 봉황교의 유래를 간단하게 들을 수 있었다. 덕분에 자료를 찾아봤다. 동아일보 1926년 9월 9일 5면에 ‘봉황교’ 이름이 보인다. 훨씬 이전에도 봉황교가 있어서 지역주민들이 이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기사 내용은 고흥의 봉산자라는 사람이 투고한 것으로 “고흥읍의 남산인 봉황산 중복에 봉황대가 있고 봉황대 아래에 봉황정이 우뚝 서있고 정자 앞에는 봉황교라는 다리가 길게 놓여있다”고 했다.
봉황정(鳳凰亭)은 국궁장을 말한다. 고흥군의 대표적인 사정(射亭)으로 1923년 초대 사두(射頭)인 신철휴(申澈休)가 고흥읍 남계리 633-20번지에 사재를 털어 건립했고, 1970년 고흥읍 남계리 641-9번지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른다.
다음날 아침 홍화식당을 다시 찾았다. 전날 저녁에 아침식사가 되냐고 물었더니 ‘얼마든지 오라’는 것이다. 주인 신씨는 우리를 위해 일부러 전어를 구워 내주었다. 밥상을 차리는 데 때마침 두부 팔러온 아주머니가 있었다. 3,500원 하는 비싼 두부 한 모를 사더니 양념장과 함께 상에 내놓는다. 전날 저녁에 유자막걸리도 얻어마셨는데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흥 인심이려는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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