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담은 남도 다도 문화와 도자기
정신을 담은 남도 다도 문화와 도자기
  • 오병희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 승인 2011.09.22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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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도자기와 차의 첫 만남은 신라시대 때 차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시작하였다. 신라시대 도기로 다기를 제작하면서 다기와 차를 사용한 옛 사람들의 운치와 덧붙여져 차문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나말여초에는 선종 승려들과 지배층의 차문화에 따른 도자 수요에 따라 우리나라에 청자가 발생했다고 학자들 사이에 인정되고 있을 정도로 차와 도자기 발달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왕실과 귀족, 사찰의 다도문화와 팔관회, 연등회 등 성대한 의례에 맞게 화려한 다구들을 청자로 제작하여 상감청자 등 청자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조선시대에 소박하고 단정한 다구들을 백자로 만들었다. 왕실에 궁중다례가 있어 조선왕들은 다례라는 말을 직접 사용하였으며 궁중에 다색이라는 직함을 두었다.

사헌부 관리들이 일정 시간을 다시 즉 차를 마시는 시간이라고 하거나 관아에는 다모라는 직함을 둘 정도로 다도가 문화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분청사기 등 도자기는 일본의 다도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쳐 임진왜란 때 조선 도공을 끌고 다도를 구성하는 기본요건 가운데 중요한 도자기를 제작하였다. 특히 토속적 아름다움과 해학미가 돋보인 분청사기는 다도에서 빠질 수 없는 도자기로 일본 고려 다완 발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남도는 한국 차문화의 근거지이자 차의 은은한 향과 맛에 흠뻑 젖는 정서를 이룬 다도의 고향이다. 조선시대 전라도 28개 군현과 경상도 8개 군현에서 차를 생산하여 진상한 기록으로 보아 전라도가 우리나라 주요 차 생산지이다.

전남 해남 대둔사 혜장, 초의, 범해 등과 같은 다승이 나왔으며 혜장, 초의와 함께 정약용이 남도 차문화를 이끌었으며 황상이 백적산에 일율 산방이라는 돌샘이 있는 차정원을 만들었다.

의재 허백련의 녹차 보급, 다문화형성과 다례 보급을 위해 만든 무등산 춘설차가 남도의 특산품으로 생산되고 있으며 보성에 전국 녹차 생산량의 40%를 생산하는 거대한 다원이 있다.

조선 다도의 조종으로 불리는 초의는 유, 불, 도 등 학문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고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 주었다. 특히 다도로 유명한데 대둔사 일지암에는 초의선사의 다원이 있으며 <동다송>을 지어 우리 차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여 ‘다선이 일미’라는 사상으로 다성으로 칭송된다.

정약용은 다산(茶山)을 호로 삼았으며 <동다기>를 써 우리 차에 대한 예찬을 펼쳤다. 강진의 다산초당에 정원을 꾸미고 차를 마시면서 10여 년 세월을 저술생활에 몰두하였다. 다산과 차의 인연은 다산이 만나게 되는 강진 백련사의 혜장과 해남 대둔사의 초의선사를 빼어놓을 수 없다. 초의선사를 만나기 전에 다산에게 차를 가르쳐준 사람은 바로 혜장이고 초의를 통해 차에 대해 체계적이고 깊은 지식을 얻었다.

차 맛은 담는 그릇에 따라 달라지는데 고려시대 강진의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 남도 도자는 다도 발전에 공헌하였다. 차는 도자기를 만남으로써 정신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를 일구게 되어 다도를 즐기는 사람들은 차를 우려낼 찻주전자와 찻잔을 필요로 하고 차의 향에 매력을 담아둘 그릇으로 다기 잔을 필요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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