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에게 시간의 안부를 묻는 부안 거리
장승에게 시간의 안부를 묻는 부안 거리
  • 전고필
  • 승인 2010.08.11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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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부안군 부안읍

▲ 남문 당산(좌) - 장승은 없고 입석처럼 서 있는 솟대이다. 받침은 거북이가 지고 있고 상륜부에도 사방으로 네 마리의 거북이가 있다. 전주 경기전의 풍판이 생각나게 하는 장승이다. 동문하나씨 벙거지(우) - 제주하르방처럼 벙거지를 썼다. 그 모습을 뒤에서 좇으니 남근석의 표상과 같아 보인다.
휴가철이다. 이른 아침 광주를 출발한 내가 글을 쓰고 있는 곳은 홍도 앞바다가 내려 보이는 어느 여관이다.

몇 회 전에 소개를 했던 그 홍도에서 나는 부안에 들렸던 3일 전의 기억을 더듬고 있다.

전공이 관광이랍시고 이곳저곳을 떠돌지만 어느 곳의 풍광이 예전과 달라지면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아픔에 가슴을 저린다. 정작 내 삶의 환경이 바뀜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 왜 내가 좋아하는 공간과 사물들은 그대로여야 하는지 그 욕심 많은 인간성에 대해 자책하면서도 말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부안읍과 관련하여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방사능 폐기장이 부안으로 들어선다고 하던 때 부안사람들의 다수는 이 일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를 했다. ‘생거부안’이라 불리는 곳에 폐기장이 무슨 말이냐며 군민들의 태반은 똘똘 뭉쳐서 결국 정부와 지방정부가 다른 곳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그 때 군민들이 집회를 하면서 일종의 문화행사와 강연회를 겸하였다. 그중 내게 요청이 들어온 것은 관광이 지닌 강점과 약점을 말하라는 것이었다. 흔쾌히 수락하고 집회에 참여한 다수에게 말씀을 건넸다.

“관광은 그 행위를 하는 이들에게는 정신적 위락을 주고 새로운 삶의 활력소를 주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일상의 주거지를 떠나 익명성이 보장되는 공간에 있기 때문에 평소와는 전혀 다른 행동양식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여 그들의 일탈적인 행위는 원래 그 공간에 뿌리를 두고 살아왔던 이들과는 너무나 격차가 심해서 서로가 서로를 경원시 하는 태도를 지닐 때도 있지만 그런 관광객의 행위를 본받는 사람도 많아집니다. 그들의 옷맵시와 행동양식을 본 받아 따라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자연스럽게 범죄의 발생률도 증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더불어 지가의 향상이나 업종의 변경, 자본의 유입량이 많아지면서 경제에 활력을 부여합니다. 이는 긍정적인 영향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평생 어업이나 농업에 종사한 사람들의 습속은 자본이 주도하는 관광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지 못합니다. 결국 투자했던 돈들은 어느새 야금야금 줄어들고 뒤이어 손을 들고 나가게 됩니다.

살아남은 한두 사람의 성공사례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 현대사회 관광개발중심의 정책이 가져온 폐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부안을 지켜온 세분의 당산을 만났다. 동문안, 남문안, 서문안 당산이 그 주인공이었다. 돌로 만들어진 솟대와 그 솟대를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동아줄의 모습이 이채로웠다.

▲ 동문하나씨(좌) - 수염의 모습과 상원이라는 말속에 남성이자 할아버지임을 연상케한다. 퉁방룽의 눈과 주먹코는 사악한 것들의 범접을 일절 허락하지 않을 표정이다. 동문솟대(우) - 원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오리는 사라져 버린 새롭게 만든 것이다. 이 네모진 몸체에 동앗줄이 묶여졌던 것이 이마적도 되지 않는다. 아쉬움이 일렁인다.
성곽의 흔적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지만 낡은 주택의 담장과 등 기대고 서 있는 모습에서 이 당산들이 부안의 순정한 영혼을 지켜준 존재라는 것에 고마움을 느꼈다.

지금 드라마로 나오는 ‘동이’의 왕인 숙종 연간 때 조성된 것이라 명문으로도 새겨져 있다. 그 시대가 조선의 왕권과 학문이 강성해지기 시작한 시대이자 또 한편으로는 양반사회의 권위적 질서들이 조금씩 해체되던 시대라고 한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일기 시작한 새로운 바람이었다. 그 사이 부를 축적한 평민들은 해 걸러 나무로 장승을 깎아 모시는 번거로움을 대체하며 자신의 이름을 내 세울 수 있는 좋은 수단으로 이렇게 장승을 돌로 모시도록 하며 수호신의 절대적 권위와 자신의 이름을 덧붙여 내놓은 것이다.

비록 자리를 옮겨온 것도 있긴 하지만 현대사회의 다양한 이해와 요구 사이에서도 묵묵히 부안 땅을 지키고 있는 장승들이 있다는 점이 독특해 보였다. ‘생거부안’이라는 말이 허튼 소리가 아님을 그 땅과 바다에 의존하는 이들의 삶속에 투영되었고 이러한 방식으로 발산한 것이라 여겨졌다.

▲ 서문당산 - 두기의 솟대와 두기의 장승을 모아 두었다. 저 오리가 수구막이를 하고 물을 가져와서 화재를 예방하고 풍농을 가져 줄 것인다. 그래서 인지 솟대를 받친 바위에는 여러개의 구멍이 뚤렸고 그 구멍에 쌀을 메우고 소원을 빌었다 한다.
장맛비가 아직 기승을 부리는 아침 강원도와 서울, 진도에서 온 벗들과 함께 그런 장승의 모습을 찾아 우중산책을 즐겼다. 밤새워 마신 술이 하나도 쓰리지 않았다. 수백 년의 세월을 풍찬노숙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얼굴로 우리를 반겨주는데 까짓 속 쓰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변해버린 도심의 환경에서 이제 담벼락이 아닌 철제 울타리에 갇혀진 장승과 솟대이지만 그가 거기 여전함에 대한 감사는 찾아온 모든 이들에게 축복처럼 새겨졌다.

강원도에서 온 벗은 강릉 강문동의 진또배기를 연상하며 호남의 문화와 강원도의 문화를 비교하고, 진도에서 온 벗은 나무 장승과 돌장승이 공존하는 민속의 보물창고 진도를 자랑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기왕 나선 길 허균과 같은 이들까지도 이곳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는 이매창의 시비가 있는 매창공원까지 찾아 나섰다.

그녀의 시에 빠진 우리가 찾은 곳은 부안의 다방이었다. 아침의 허기를 허름한 다방에서 노른자 둥둥 띄운 쌍화차를 한잔 마시고 한 시대와의 이별을 고하였다.

휴가철이다. 유명한 관광지도 많고 쾌적한 유원시설도 많지만 골목의 속살을 더듬어 보면 아직도 역사를 만들어왔던 과정이 내재되어 있는 마을을 주변에서 만날 수 있다.

그렇게 떠나보자. 그리웠던 날들을 상기하면서. 그리고 가급적 차 안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자. 그 동네의 허름한 점빵에서 생수도 사고 아이스크림도 사고 밥도 먹어보자.

진정한 관광은 정신은 채우고 지갑은 비우고 오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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