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떠나는 기차여행에서
어머니 떠나는 기차여행에서
  • 전고필
  • 승인 2010.07.07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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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연천군 전곡면 고문리

▲ 여섯 시간을 기차로 막내딸을 찾아가는 어머니의 모습.
여행은 낯설음에 대한 적응이란 대답이 간단하게 무너졌다. 6월 말일 전해진 한 통의 전화는 내 일상의 스케줄을 멈추게 했으며, 그곳에서 여행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만들었다. 멀리 경기도 연천에 사는 여동생의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부음이 그 단초였다.

소식을 들은 나는 재빨리 올라가는 것이 가족의 성원으로서 도리라 여겼지만 어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이미 예견했던 부음인지라 하루 쯤 늦는다 해도 그다지 누가 되는 일은 아니라는 말씀이었다. 해서 탈상을 하루 앞둔 7월 초하룻날 우리는 떠나기로 했다.

사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장맛비가 내리면서 농사꾼의 입장에서 이 소중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이제 봉긋 솟아오른 깨 모종을 이리 저리 옮겨야 했고, 고구마 순을 놓기도 해야 하고, 지긋지긋한 새떼들로부터 콩 씨앗을 보호하기 위해 비닐로 덮어 놓아야 하는 것이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매일 회관에서 점심을 나눠먹는 이즈음의 농촌모습이 내 시골마을에도 똑같이 적용되는데,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어머니가 이날 당번에 해당되어 모든 식사준비를 해야 하는 날이기도 했다.

나는 나대로 또 사정이 있었다. 열흘 전부터 급작스럽게 시력이 뚝 떨어져 아침 일찍 병원으로 가서 시키는 대로 양쪽 눈을 부라리고 치켜뜨고 곁눈질하며 무차별적으로 찍어대는 사진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다 혈관주사까지 맞아가며 물경 세 시간만에 기다리던 의사선생님을 만났다. 시력저하의 원인은 눈으로 공급되는 양분을 전달하는 혈관 대부분이 기능이 정지된 상황이라고 한다.

치유의 방법은 신경을 쓰지 않는 것과 더불어 안정을 취하며 약물 처리를 하는 것이라 하니 참 처량한 신세다. 그래도 딱 어울리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 놀고 피곤하니까 하루 쉬는 것.

그나마 원인과 처방이라도 받고 보니 적이 맘이 놓였다. 그래 오후 두시 경 버스로 가자던 어머니와의 약속을 상기하고 시골로 모시러가니 어머니는 이제야 밭에서 그 많은 일들을 처리하고 내려오셨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두 두릅의 굴비를 박스에 넣고 집을 나섰다.

▲ 재인폭포 가는 길 울울한 산림.
어머니에게 KTX를 타 보셨냐고 여쭤보니 그런 경험이 없다고 하여 버스를 고속열차로 바꿨다. 예약을 하다 보니 어머니의 연세가 들어온다. 늘상 한 가족이기에 나이와 무감하게 지내왔는데 어머니가 경로우대를 받아야 할 연세에 이른 것이었다. 지난달부터 연금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말씀도 잊고 있었는데 주민등록증을 제시하니 30%의 요금이 할인된다.

그렇게 어머니를 모시고 용산으로 향했다. 여느 시골 어머니가 그렇듯이 평생 논으로 밭으로 고생하셨던 지라 서너 해 전 무릎 고관절 수술을 해 드렸는데 새로 나온 ‘산천’이라는 고속철도는 다리 뻗기가 쉽지가 않다.

빠른 것은 그럭저럭 인정할 수 있지만 세 시간 가량을 그냥 웅크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 어머니에게는 고된 일일 진데 창밖으로 풍경을 바라보다 집에서 얼려온 결명자차를 내게 권하기도 하며 드시는 것으로 소일을 하신다.

그렇게 평야지대를 지나 건물들 빼곡한 서울에 접어들었다. 어지러워 이곳저곳 보기 싫으시다고 하시면서도 내내 창밖을 주시하는 눈길은 거두지 못한다.

▲ 산 빛의 푸르름을 짜낸 듯 물 또한 푸르게 조화를 이루는 계곡의 모습.
“서울 여러 번 오셨지요?” 라고 물으니 “그라지야. 누구 결혼할 때도 오고 누구 환갑이라고도 오고”, “글믄 그것 말고 따로 놀러 온 것은 없능가?”, “와 봤제야. 롯데월드도 가고 한강유람선도 타고 63빌딩, 현충원까지 들렸는디야.”, “창경원이나 덕수궁은 안가보셨지라우?”, “응. 근다. 그래도 가 볼디는 다 가봤제야.” 그러셨던 것이다.

동네에서 누구 결혼이라도 할 적시면 대절버스로 서울을 올라오고 혹시 혼주가 맘이 너그러우면 오신 김에 여행이라도 하고 갑시다, 하면서 명승지 한곳 들렸다 가는 패턴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용산에 도착하여 이번에는 전철로 바꾸어 탔다.

경로우대자의 표를 끊는 방식이 어머니도 나도 처음인지라 이리 저리 방법을 찾다가 친구에게 물어봤다. 아 거기 우대증 표 끊는 곳 있는데 보증금 500원 주면 나와. 그것을 카드처럼 사용하고 도착지에서 다시 환불기계에 넣으면 500원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어머니의 경로우대권자로의 적응은 점점 활기를 띄어갔지만 못내 서운한 것은 늘 그대로인 듯 했던 어머니가 이제는 나와 간극을 두게 된 것이다.

소요산까지 물경 30여개의 정거장을 거쳐야 하는데 그 사이 경로석에 자리가 두 개 생겼다. “아가 저기 앉자.”라고 하시며 경로석을 가르킨다. “엄마가 글로 앉으쇼. 난 경로 아닝께 서 있으께라” 어머니는 그렇게 경로석에 앉고 나는 그 곁에 서 있다가가 교외로 빠져 나갈수록 사람들이 줄어들 때 어머니 곁에 앉았다.

그러면서 어머니에게 여행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머시다냐. 아는 사람들 해야 할 일 하면서 짬나면 좋은 디도 찾아가고 놀다가 또 산디로 돌아오는 것이제” 결국 낯설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들을 매개로 하여 새롭게 익숙해질 것을 사귀는 과정이 여행에 담겨 있다는 뜻이었다.

▲ 단애를 이루고 있는 사이로 한 굽이 물길이 시원하게 내리는 재인폭포의 모습.
그렇게 말씀을 듣고 기차에서 내려 장례식장을 찾았고 문상을 마친 후 먼 경기도 땅의 친척들과 얼굴 맞대며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 이른 아침 재인폭포를 찾았다. 새벽의 재인폭포는 안개에 가려 제 모습을 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한탄강의 협곡사이 웅장하고 신비로운 자태로 세상에 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폭포를 품은 계곡의 청신함에 젖어들다 이승의 여행을 마치고 새로운 세상을 떠나시는 사돈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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