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느영화제 각본상, 이창동 감독에게 바란다
깐느영화제 각본상, 이창동 감독에게 바란다
  • 김영주
  • 승인 2010.06.01 09: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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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동 감독.
이창동 감독이 어느 인터뷰에서 “앞으로 영화를 더 만들 수 있을지 염려된다.”고 하기에, 대중재미가 약하고 작품성이 높은 영화에 대한 염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영화진흥협회의 영화공모에서 두 번이나 탈락하고, 심지어는 “영화 각본이라기보다는 소설 스타일이다.”며 아무개 심사위원이 빵점 처리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전해 듣고서야, “그의 염려가 정치적 핍박에 있었구나!”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의 영화가 ‘사회파 리얼리즘’에 수준 높게 충실하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외면당할 뿐만 아니라 보수정부에게서 핍박받는 건, 그가 감내할 수밖에 없는 고난이다. 더구나 지금 정권이 ‘노무현의 모든 걸’ 뒤집어엎으려고 핏발을 세우고 있는데, 노무현 정부에서 문화부장관까지 하였으니 더욱 그러할 꺼다. 그는 대체로 2~3년에 한 작품씩 나오는 듯하다. 설마 그의 작품을 만나지 못할까마는, 그의 작품을 자주 만나고픈 갈망에 그의 고난이 많이 안타깝다.

정치가 萬事다. 정권이 바뀌면, 모든 게 바뀐다. 그래서 정치는 무엇보다도 그 권력을 빼앗기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 빼앗겼으면 당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5.18행사장에 방아타령을 연주하고, 당 대표란 사람이 울긋불긋한 花環을 보내는 그들에게, 그 무슨 말을 더 하겠나! 결국은 모든 게, 우리 국민의 수준이 겨우 그것 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이 땅에 사는 한 감당할 수밖에 없는 ‘시지프의 바윗돌’이다. 논리나 독설 또는 설득이나 교류로 고쳐질 일이 아니다. 온 나라가 뜨거운 꼴을 톡톡히 당해 봐야 고쳐질 일이요, 기나긴 고난 속에서 세월을 두고 고쳐져야 할 일이다.

어렵겠지만, 정치적 핍박에 신경질 내봤자 아무 소용없다. 훌훌 털어버리시라! 대신에, 그도 이젠, 대중재미 쪽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부탁을 드린다. 그가 세상인심에 타협해서 ‘사회파 리얼리즘’에서 벗어나라는 말이 아니다. [박하사탕]은 그 슬픔의 처절함으로 가슴을 후벼 파는 감동이 있었고, [오아시스]는 문소리의 눈물겨운 연기력과 설경구의 놀라운 연기력이 절절했다. 그러나 대중재미를 고려한 흔적은 없다.

이번 영화 [시]는 윤정희의 처참하게 무너지는 슬픔을 리얼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詩 뒤에 감추어 버렸다. 어찌 보면 감추어진 슬픔이 더 처참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관객 입장을 배려하면 그렇게까지 감추어 버리면 이야기의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중간쯤에 지루해져 버린다. 그녀의 죽음이, 느닷없어 보일 정도이다. 그의 ‘사회파 리얼리즘’이 보여주는 지극한 미감과 깊은 숙성은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올라있다. 이젠 그가 대중재미에 관심을 갖고서, 대중과 소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누가 어떤 작품성을 추구하든, 대중과의 소통을 항상 소중하게 여기고 항상 고민해야 한다.

▲ ⓒ네이버 영화
내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다른 작품보다도 [이웃집 토토로] [라퓨타] [붉은 돼지]를 더 높이 평가하는 것도,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임순례의 [와이키키 브라더즈]·봉준호의 [플란다스의 개]·박찬욱의 [공동경비구역JSA]·나희찬의 [바르게 살자]·이연우의 [거북이 달린다]· 닐 브롬캠프의 [디스트릭트 9]·라스 폰 트리에의 [어둠 속의 댄서]를 매우 높이 평가하는 것도, 이 작품들이 ‘사회파 리얼리즘’의 작품성을 높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중재미가 자알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작품성이 별로이면서도 마치 작품성이 있는 것처럼 허세 부리거나 잔재주 피우는 작품을 나는 매우 싫어한다. 작품성을 갖추려면 이창동 작품처럼 작품성을 제대로 갖추어야 하지만, 대중과의 소통을 항상 배려해야 한다. 대중이 때론 천박하고 역겹기도 하지만, 때론 소박하고 진정어리기 때문에, “민심이 천심이다!”는 위대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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