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과 천불천탑의 꿈을 찾아
5월과 천불천탑의 꿈을 찾아
  • 전고필
  • 승인 2010.05.25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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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화순군 도암면 용강리·대초리

30년이다. 그때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이제 마흔하고도 넷을 먹은 불혹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 나이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삶의 터닝 포인트를 만들지 못하고 어디에도 기대지 못한 가운데 그렇게 나이만 별책부록처럼 따라 붙었다.

어지럽다. 세상을 위해 난 무엇을 했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5월이기 때문이다. 오지랖이 넓은 탓에 이래저래 일에 관한 주문이 들어왔다. 3월과 4월에 쏟아지기 시작한 일들을 5월에 처리하다보니 일에 치이고. 대저 그런 일이라고 하는 것이 통음을 수반하여 몸까지 망가지게 한다.

▲ 두해전 화마가 운주사를 쓸고 갔다. 그럼에도 절 내부는 지켜졌다. 그리고 수목에 가려진 불상과 불탑의 모습이 이렇듯 선연하게 드러났다.
그럼에도 어찌어찌 버텨오다 내 몸의 8할이 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몸이 움직이지 못하니 머리까지 얼어붙어 쩔쩔매는 중이다. 그 와중에 화순군 도암면에서 운주축제를 준비하자고 했을 때 내 머릿속에는 ‘그래 중요한 시점이다’하고 받아 들였다.

농투성이들이 모셔온 사찰, 신비한 전설 천불천탑의 비밀을 간직한 사찰, 그 와불이 일어서는 날 서울이 이곳으로 옮겨온다는 말씀이 전해지는 사찰, 무엇보다 4월 초파일과 매해 추석이 되면 근동 30리 안팎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주체도 불분명한 가운데 그들만의 축제를 벌였던 곳이 그곳이다.

거기에 한 시대의 아픔과 회한을 지닌 이들이 성지처럼 찾았던 곳이자 80년 5월 뼛속 깊이 좌절을 경험한 이들이 서로를 위무하기 위해 찾았던 이곳 운주사는 그야말로 광주의 5월을 함께 위로하고 새롭게 도모하는 처소로서 적임지였기 때문이었다.

▲ 축제때 마다 한분씩 모시는 불상이 열다섯번째이다. 그 불상의 수인을 따라하며 염원을 모으고 있는 주민의 모습.
그런 운주사를 찾아 갈 때마다 나에게는 마을사람들 한분 한분의 추억이 귀에 박힌다. 서로 등을 대고 있는 부처님을 석실에 모셔둔 석조불감에 이르렀을 때 오영표라고 하는 어르신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그가 우리 동네 사람들한테는 중요한 곳이여. 이짝은 논이었는데 가실이었을 것이여. 이 논의 임자가 벼를 베고 있는디 한 여자가 떡시리를 이고 왔어. 그러던만 시리를 받치고 불공을 드리는 것이여. 긍께 뭔 소원이 있능갑다 그럼시롱 그냥 일을 했제. 근디 잠시 후에 보니 어디서 돌 찍는 소리가 들려. 그 여자는 안보이고. 해서 주인양반이 요쪽으로 와보니 그 여자가 돌을 받쳐놓고 부처님의 코를 띠고 있어. 긍께롱 이 양반이 뒤쪽으로 가서 그런 것이여. ‘아이구 코야. 아이구 코야’ 그 여자 어쩠것서. 그냥 너무나 놀래서 시루도 안 갖고 내빼분 것이여. 아무래도 아들 낳게 해달라고 온 것이제. 여기 절의 부처님 코가 한 개도 성하지 않은 것이 다 그런 것이여.”

▲ 연등 아래 기도를 드리는 스님 모습.
그랬다. 이 절의 부처님은 생긴 모양도 필부필남과 다름없어 중생의 고통을 금방이라도 해소할 태세를 갖춘 친근한 벗이자 해결사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했던 것이다.

천불천탑을 조성하고 연장을 숨겨 두었다는 연장바위를 시작으로 일직선상에 서 있는 석탑들, 바람에 풍화된 누더기의 탑신을 지닌 동낭치탑, 바위에 기대거나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결코 세상은 유아독존하지 못함을 몸으로 일러주는 석불들, 몸과 머리를 따로 가지고 있는 불상들의 처연함, 그러나 결코 슬프지 않는 모습들.

칠성각을 따로 모시지 않고도 일곱 개의 바위를 통해 칠성신앙을 표현한 양식 또 그 안에 내재된 고려시대로 추정될 시기의 천문에 대한 인간적 표현이 남아있는 근거. 북극성의 자리에 아직 시립하지 못해 와불로 불리는 불상은 운주사가 전국 어느 사찰과 다른 극적 요소를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터다.

▲ 부처님의 얼굴이다. 한데 또 무언가의 용도로 이 모습을 조각내려다 멈추었다. 민중의 가슴에 새겨진 상처와 어쩌면 다르지 않는지.
이런 운주사가 지닌 내력을 밖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그리 간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속살에 서려있는 많은 내력을 현현하고 이 땅의 주인이 이 나라의 백성이듯, 이 사찰에도 이곳 도암사람들의 정신과 공력이 들어있음을 함께해주며, 절과 주민들과 함께 축제의 장을 만들어 보자고 나섰다.

그리고 이런 운주사와 지역의 발전을 위한 토론회의 자리를 마련하며 경내를 돌아보았다. 5월 신록이 가득한 날, 부처님과 탑들은 모두 건사했다. 비와 바람에 풍장을 당하면서도 끝내 쓰러지지 않는 잡초처럼 건사했다. 세상이 역주행을 거듭한다고 아우성치는 가운데도 그 절집은 성성했다.

하지만 그 옛적처럼 이곳을 성지처럼, 민족의 소망을 담으며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이들을 만나기는 어려워보였다. 30여년의 세월이 사람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고, 발악을 하며 만든 축제의 프로그램에서도 5월 광주와 전라도가 경험하며 만들고자 했던 지고지순한 의미를 담아낼 수 없었다.

세상이 저만치 가는 가운데 이 풍진 세월 지켜보고 있는 저 부처님 뵙기 민망한 날들을 감당하기 어려워 와불 곁에는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운주사를 나오는 길, 와불님을 만나지 못한 친구가 외친다. “나는 기꺼이 와불(臥佛)이 아니라 와인(臥人)이 되겠다.” 그 말을 들으며 나 또한 다짐해 본다. 이제 결코 부록 같은 삶은 살지 않겠노라고. 5월 운주사는 그렇게 내게 성성하게 말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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