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변산 구름속의 산책
내변산 구름속의 산책
  • 전고필
  • 승인 2010.02.11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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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 바디재

▲ 우주는 둥그렇고 땅은 네모지다. 산은 우주를 닮아 둥그렇고 인간도 우주를 쫓아 둥그런 집을 짓고 산다. 그리고 죽음도 우주로 귀환하기에 저렇게 둥그렇게 모셔지는 성 싶다.

며칠을 빗속에서 보낸다. 이슬비라고 해야 할 것 같은 비는 조변석개의 세상을 비웃으며 우기에 이른 것처럼 쉬지 않았다.

비가 지상에 내리면 나는 먼저 그 빗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때론 강하게 때론 약하게 때론 부드럽게 내리는 소리는 저 마다의 운율을 지니고 있다.

어떤 때는 녹음을 해서 다시 들어본 적도 있다. 그런 빗소리를 들으려면 어디가 적격일까 싶어 궁금해 찾았던 적이 있다. 대숲에 떨어지는 소리는 죽비소리에서 시작하여 도란거리는 소리로 변했고, 호수 위에 떨어져 후두둑거리는 소리는 북소리처럼 멋있었으며, 도로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장고소리처럼 쉼이 없었다.

함석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풍경소리처럼 바람과 대화를 나누는 선계의 운율로 끌어가는 힘을 가졌다.

고택의 기왓장에선 목탁소리가 났다. 그 기와 선을 타고 내리는 빗소리는 맑은 징소리를 닮아 명징하고 여운이 깊었다. 초가지붕에 내리는 빗소리는 울밑 봉선화의 잘 여문 씨앗이 톡톡 터지는 식물성의 여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이마적에는 그런 귀의 호사를 누렸는데 이제는 기억만 가물하니 이참에 한번 빗소리를 찾아볼까 망설이다 길을 나섰는데 잘못 되었다. 시각에 경도되어 청각을 잃어버린 것이 진실이다.

▲ 하얀 구름의 면사포로 둘러쌓인 산은 이때쯤이면 겨울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말랐던 계곡은 싱싱한 물로 가득하며 숲속에서는 바시락 거리며 변산바람꽃, 노루귀 등이 싹을 내밀 것이다.

변산으로 갔다. 얼음장 같은 겨울을 녹이는 비는 그곳에서 는개로 바뀌어 있었다. 비가 녹여낸 땅의 따뜻한 기운이 연신 하늘로 비상하고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길을 잡았는데 어느 새 나는 눈동자의 초점이 이끄는 데로 가고 있었다. 산하의 모든 잠든 것들이 깨어 날 성 싶은 포근함이 느껴진 것은 구름인 듯 안개인 듯 피어오르는 먹빛 연무의 모습에서 상상되었다.

저 흙 아래 뭇 생명들이 기지개를 펴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피어오르는 것이라는 상상 말이다.

구름호수라 칭하는 운호마을 안쪽 깊숙이 산골짝에는 변산바람꽃이 피어 있을 것 같은데 내가 아직 봄을 맞을 준비를 하지 않아 포기했다. 그리고 우반동 마을 안쪽으로 길을 잡았다.

건축가 가우디는 “곡선은 신의 것이고 직선이 인간의 것”이라는데 아직 변산은 신의 마지막 영토처럼 남아 있어 보였다. 물론 어깃장이 난 것들이 많기도 하지만 적어도 길 만큼은 그리 하지 못한 것이 퍽 안심스런 대목이었다.

반계 유형원의 교학지소가 있는 산을 올려보며 우반동의 골짝 바디재로 들어서니 호수 하나 등장한다. 우동저수지였다. 그 저수지에 구름의 춤사위가 한창 진행 중에 있었다.

저음으로 내려앉았다 다시 휘몰이로 몰아치다 솟구치고, 그 사이 새로운 구름이 아래에서 올라오고 포개어지며 농담이 짙어졌다 다시 부드러운 비단곁로 변신하는 모습들. 산과 구름을 담은 호수는 어지럼을 일으키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고 나 또한 넋을 잃고 있었다.

▲ 종잡을 수 없는 구름이 수면위에 드리워져 자맥질을 하다 다시 활공을 한다. 그 사이에 산의 실체가 호수 속에 조금씩 띠웠다가 사라지며 숨바꼭질을 한다.

아! 천지간의 공사는 이 순간에 이뤄지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구름의 행로는 상상을 초월했고 그 속살에는 도저히 내 눈길이 미치지 못했다.

산중에서 이뤄지는 계절의 천지공사, 그 내밀한 세계를 엿보려는 나의 시도를 아는지 구름은 더욱 기승을 부리며 산하를 감싸고 나는 혹여 모를 세계를 향해 또 눈길을 주었다.

몸에는 어느새 는개가 뿌린 이슬방울이 맺혀 내 살의 감촉이 이리 부드러운지를 처음 알게 했다. 카메라의 렌즈에도 성에처럼 안개가 끼었다고 물기를 머금었다.

어느 순간 감응을 놓고 있으니 내가 구름인지 호수인지 산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졌다. 인적조차 없는 그곳에서 구름의 향연이 나를 물아일체로 이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얼마만인가? 저 자연에 비로소 편입되어 지는듯한 착각을 해 보는데도. 20여 년 전 아무도 없는 지리산에서, 그리고 10여 년 전 사람과 유흥가의 소음으로 왁자지껄했던 강원도 태백의 황지에서.

벅찬 가슴으로 길을 따라 내변산을 순례했지만 우동저수지에서의 황홀경은 다른 모든 풍경들이 따라 설 수 없을 만큼 깊게 잠재되어 더 이상의 길 더듬기는 무미해 보였다.

길 위에서 또 다른 길을 그리워한다는 말은 그 날 만큼은 허용할 수 없는 날이었나 보다.

아! 지금도 그 안개와 는개가 내 살갗을 쓰다듬으며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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