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천에서 올레길과 만나다
강정천에서 올레길과 만나다
  • 전고필
  • 승인 2009.12.28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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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강정동

“모든 길은 본디 주인이 없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이 말씀은 이 땅의 산과 강의 체계를 정립한 「산경표」를 쓴 조선 땅 순창사람 여암 신경준의 것이다. 길을 기능적인 路로 받아들이지 말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道로서 받아들이는 주인이 되라는 말씀을 길손은 가슴 깊이 새기고 늘 길 위에 선다. 그것이 내 여행법이다.

▲ 올레길은 천연덕스럽다. 억지를 부리는 길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자연의 삶과 인간의 철학이 공존한다.

며칠 전 제주에서 워크숍이 있었다. 오후 두시 무렵 시작한 것인데 그 시간이 다가올 무렵 네 명의 친구들이 숨을 헐떡거리며 도착했다. 숨은 벅찬데 얼굴에는 사뭇 여유와 만족감이 넘쳐났다. 먼저 얘기를 한다. “우리는 새벽 비행기를 타고 일찍 제주를 와서 외돌개에서 강정천까지 다녀왔어요. 올레길 7코스를 다녀왔어요” 라는 말이었다.

“잘 하셨네요” 라고 대답하면서 우리가 행사를 진행하는 공간이 7코스 올레길의 중심공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코스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여 코스의 전체를 가진 못하지만 적어도 일부라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해가 뉘엿거릴 무렵 숙소 주변을 흐르는 강정천을 다녀왔다. 제주 땅은 용암대지로서 비가 오면 대부분의 물이 암반 사이로 스며드는 구조를 지녔는데 이것이 제주의 하천까지도 물이 흐르지 않게 하는 건천의 구조이다.

▲ 물은 만 갈래로 시작하여 하나로 흘러간다. 강정천은 태평양의 지류이다.

한데 그런 제주에서 유독 강물이 흐르는 곳이 있는데 바로 강정천이라는 하천이다. 전장 길이가 18km에 이르는 이곳은 물이 맑아 은어떼들이 살기도 한다. 불쑥 튀어 오른 암반을 징검다리 삼아 300여 미터 정도를 걸어보았다.

곳곳에 피리떼들이 튀어 오르고 노회한 가마우지와 백로, 왜가리는 기회를 엿보고 있는 순간이 눈에 들어왔다. 살아있는 강물의 건강함과 조우한 것이다.

그들의 만찬을 깨고 내려가니 강정천이 끝나는 곳이다.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강물이 바다로 섞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곳을 한국의 나이아가라 폭포라고 평하기도 했는데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 물 때문에 저 바다가 그렇게 맑고 투명하겠구나’ 라는 생각이었다.

▲ 물은 조건을 달지 않는다. 그저 흘러갈 뿐이다. 채워지지 않은 곳은 채워 수평을 견지하면서, 오탁한 것은 깨끗이 정화하면서

그리곤 어느 시에서 “바닷물이 저렇게 시퍼런 것은 끊임없이 제 몸을 때려 멍들었기 때문”이라는 말을 떠 올리며 피식 웃음을 흘겼다. 함께 걷던 친구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혼자 바닷물에 몸을 섞는 냇물의 아우성을 새겨듣다 10여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상념의 시간을 가졌다. 난 왜 이다지도 세상에 섞이지 못하고 불화하는지가 화두였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 잘 섞여 살고 있고 혼자 짐짓 고결한 척, 못 섞이는 체 하는 이중성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깨닫는 데는 아직 내 밥숟가락을 든 손이 멈추어 본 기억이 없다는 것이 여실히 증명하지 않는 것이냐 라는 반문 때문이었다.

그럼 저 강물은 바다라도 맑고 푸르게 만드는데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이어지자 속수무책인 나는 부스스 일어나 밥이나 축내러 가는 수밖에 없었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좌표를 잃어버린 불혹(별책부록)의 몸뚱이를 끌고 돌아오는 내 그림자가 너무나 길어 보였다.

이틀간의 워크숍 일정을 마치고 다시 시간을 내었다. 누군가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 어디냐고 물으면 내가 우스개 삼아 했던 말이 “해안초소”였다. 강정천 넘어 강정 마을, 어업과 하우스 감귤, 화훼 등을 주업으로 하는 이 마을에 해군 기지가 들어선단다.

평화의 섬은 상징뿐이고 군사기지 구축이 웬 말이냐고 그 선봉에 선 제주지사를 소환해야 한다는 주민투표까지 주도한 마을이었다. 이들의 간절한 말씀이 제주의 억샌 해풍에 풍장을 당하고 있었다.

아! 초소가 사라진 곳에 기지가 들어서려는 아이러니는 또 어찌해야 하는가? 어쩌지 못하는 길손은 강정 마을에서 강정천까지 걸었다.

▲ 마을을 기지로부터 지켜내려는 간절한 염원들이 거욱대와 조탑과 조형물에 스며있다.

마음을 다잡고 걷는 길에서 아름다운 강물과 마을과 선뜻 목마른 길손에게 귤을 던져주는 사람을 만났지만, 길에 꽂아둔 해군기지 결사반대의 깃발이 끝내 길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그 올레길을 가만 되짚어 보니 제주사람들이 초라한 육지 것들에게 던져주는 선물이었다. 세상과 불화 속에서도 존재의 가치를 새롭게 깨닫고 정진할 수 있는 길의 주인이 너라는 것을 일러준 것이다.

기쁨은 모래알보다 작았고 슬픔은 모래알만큼 많았다는 사람들이 오늘 우리들에게 제 몸이 사위어 지는지 알면서도 커다란 선물을 준 것이다.

이 겨울 다시 한 번 강정천의 물처럼 제주사람들의 삶에 섞여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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