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의 흔적을 따라가다
중원의 흔적을 따라가다
  • 전고필
  • 승인 2009.10.09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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뺏고 뺏기는 삼국의 항전 치열했던 현장

수수가 붉게 물들어 횃불처럼 일렁이며 가을을 알려준 중원의 풍경 아직 선연하다.

얼마 전 광주를 벗어나 호남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중부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 등을 거치며 단양에 들었다. 물경 4시간 20분.

시멘트와 육쪽마늘, 내륙의 바다 충주호가 펼쳐져 있는 곳이다.

먼저 단양적성비를 찾았다. 물의 경계와 길의 통치를 두고 삼국의 항전이 치열했던 단양, 중원, 제천, 문경, 충주 지역의 흔적이 적성비에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그다지 높지 않은 산마루에 설치된 성곽은 아래에서 올려보면 저것이 무슨 요새역할을 할까 싶지만 막상 들어서면 사방의 모든 길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OP와 같은 자리였다.

▲단양적성 산마루를 따라 활처럼 휘어져 사위를 응시하고 있다. 바람의 결처럼, 세월의 결처럼, 역사의 장강처럼.

거기 적성비는 진흥왕시절 영토 확장을 도왔던 이들에 대한 공훈과 이를 도와주는 사람들은 포상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채 기름기 없는 고졸한 글씨체로 새겨있었다. 역사에 눈을 판 이들은 내용에 가치를 두지만, 서예를 하는 이들에게는 신라의 글씨를 비교 분석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풍경과 산물은 취하는 이의 주관에 달려 있으니 말이다.

이로부터 멀지 않은 충주에는 중원 고구려비가 있다. 그 모습이 마치 광개토대왕비의 축소판인 듯한 비에는 장수왕시절 남진정책을 통해 영토를 확장한 흔적이 남아있는데 이 또한 고대의 금석문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곳이라 한다. 하지만 글이 마모되어 제대로 들여 보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적성비는 비문이 땅속에 묻혀 있어 풍파에 시달리지 않았지만 고구려의 것은 마을의 입석으로, 대장간의 기둥으로 쓰이면서 풍장을 당해왔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고 다시 호명되는 역사의 순환을 그 돌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로부터 벗어나 아기자기한 눈 맛을 선사한 고수동굴을 들른 후, 단양팔경의 일부를 보기 위해 장회나루에서 인당 1만원하는 유람선을 탔다. 내륙의 호수에서 배를 타는 것도 이색적이지만 바위마다 독특한 풍경을 간직한 아름다움에 젖어 들 수 있었고 단양팔경의 하나인 구담봉과 옥순봉을 함께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짧은 하루를 보내고, 수안보 온천에 들러 오랜만에 온천수에 몸을 담궜다. 다음날, 길과 통치의 역사가 다르지 않음을 상징하는 죽령, 이화령, 죽립령, 조령, 토끼비리, 하늘재 등과 같은 옛길 중 ‘새재와 하늘재’ 두 길섶을 택했다.

먼저 택한 곳은 중원 미륵대원터를 품고 있는 하늘재. 길은 옛 모습 그대로 단아하게 오솔길의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운치와 정감이 묻어났다.

하늘재의 충청도 쪽이 미륵리라는 지명을 가지는데 넘어서는 문경에서는 관음리라는 지명을 취하고 있었다. 미륵은 미래불을 상징하고 관음은 현세불이니 이 또한 깊은 의미를 가질 것인데 하늘재의 한쪽에서 미륵님과 조우하는데 만족하고 말았다. 거대한 석불을 조성하고 그 옆에는 바위로 판축하고 석굴사원처럼 만들었던 그 미륵사 터는 폐사지이면서도 결코 주눅들지 않는 고풍스러움과 신비감을 뿜고 있었다.

▲중원미륵사터의 미륵불상 바위 사이로 슬며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우리의 미래를 저 고운 모습에 맡겨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에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초입의 거북은 빗돌을 잃어버린 대신 등갑 위에 두 마리의 새끼 거북을 거느리고 있었고, 두기의 석등은 이 절이 밤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를 짐작하게 만들어 주었다.

신라가 망하자 숨을 곳을 찾던 마의태자가 조성했다는 설을 지닌 절의 한쪽에는 고구려 장수 온달이 가지고 놀았다는 공깃돌이 있었다.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공굴리기를 할 때 썼던 크기의 공깃돌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저 정도는 가지고 놀아야 장수라 할 수 있지. 암 그렇지. 너무나 왜소해진 오늘을 레시피로 곁들였던 탓이다.

월악산이 품고 있는 이 절터를 나와 또 하나의 폐사터를 찾았다. 사자빈신사터라고 알려진 그곳에는 네 마리의 사자가 주춤거리며 앉아 있고 그 중앙에는 머리에 두건을 하고 뒤에는 리본처럼 매듭을 한 모습의 비로자나불상이 있었다.

▲사자빈신사석탑 머리에 두건을 한 비로자나불을 사면의 사자가 호위하고 있다. 석탑이 웅장하지 않고 단아하여 가까이 다가가 손쉽게 내 마음 열어 보일 수 있는 자태였다.

성스러운 사자상을 가진 석조유물이 남도에는 광주박물관에 중흥산성 쌍사자석등과 화엄사의 4사자 삼층석탑이 있음이 기억났다. 이렇게 폐사지를 보고 문경새재로 넘어갔다. 새재의 첫 관문 주흘문과 조곡문까지 걷는 길은 보슬보슬 내리는 비에 젖어들며 마치 옛 선비들이 떼를 지어 과거를 보러 가는 것 같은 풍경을 엮어냈다.

모처럼의 걷기를 마치고 그런 길의 역사를 담은 옛길박물관에서 잊혀진 우리의 옛길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고 오늘날에도 주목받는 길이 어떤 곳인지를 공부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길 위에서 이틀을 보내고 광주로 돌아왔다. 한데 자꾸 내 여행이 점을 찍는 것으로 끝나가고 있다. 한곳에 깊이 천착하며 면적인 여행방식을 취하지 않으면 내내 후회할 것 같은 세월의 연속이다.

명심하자. 여행은 점도 선도 아닌 면으로 다닌다는 것을. 다시 중원이 그립다. 보름달의 호수와 폐사지와 바위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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