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한 삶 있어 세상은 아름다워
순정한 삶 있어 세상은 아름다워
  • 전고필
  • 승인 2009.09.04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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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영동군 자계예술촌과 영국사

여름이 꼴딱 넘어간다. 길섶에는 갈대가 하늘거리고 산 가장자리에는 며느리 밥풀 꽃이 피어나고 습한 곳에서는 물봉선이 꽃을 활짝 피웠다. 운 좋은 길에서는 앙증맞은 도토리와 상수리의 축포를 맞을 수 있는 계절이기도 하다.

충북 영동을 찾았다. 민주지산 가까이 용화면 자계리의 자계예술촌을 둘러보는 길이었다. 대전을 근거로 ‘극단 터’를 운영하던 이가 폐교에 둥지를 틀고 십 년째 안거하고 있다. 손대야 할 곳이 많으면서도 재산권의 제약때문에 손보기 어려운 교육청 소유의 폐교에서 그는 다섯 명의 단원들과 함께 많은 일을 일궈왔다. 그런 노력 덕분에 2004년에는 문화부에서 생활친화적 문화공간 조성 사업으로 1억 8천만 원의 지원받아 공간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한 분야에 천착하며 제 길을 가는 갑남을녀들이 많은 것을 꿈꾸지만 그런 사람 만나기가 어려운 세상인데 운 좋게 나는 그런 사람들을 몇 년간 만날 수 있었다.

▲ 가을 햇볕이 자글자글 끓고 분주한 잎새들은 서서히 태양의 색에 물들어 간다. 사람도 묵어지면 삶이 붉게 빛나는 것일까. 자계예술촌의 촌장과 그 단원이자 옆지기.

불과 두세 시간의 인터뷰를 하는 내내 즐거웠다. 로또에 당첨된 것처럼 기뻤던 순간부터 실내외의 공연장과 연습실을 리모델링하려 하니 교육청이 완강하게 거절하는 부분에서 아팠다. 해서 일단 일부터 저질렀고 이제는 교육청에서 외려 더 반겨준다는 집념의 세월을 말하는 그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런 순정한 삶이 있기에 세상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아쉬운 시간을 뒤로하고 천태산 영국사를 찾았다. 한해 전 이곳에서 먹었던 밤으로 만든 막걸리를 광주로 공수하고 싶었다. 해거름의 산사로 발길을 잡았다.

칠백여 미터의 조붓한 오솔길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암반층과 벼랑들이 함께 있어 마치 설악의 한 계곡 자락처럼 느껴지는 길이다.

해찰을 즐겨하는 나는 장마에 깎여온 바위가 산화한 모래톱에 눈길을 주었다. 그러다 십여 미터 남짓한 벼랑 위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를 보았다.

“벼랑 위에 기를 쓰고 자란 소나무를 보면 애국가를 1절부터 4절까지 부르고 싶다”라고 노래한 시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랫동안 애국가란 단어를 잃어버리고 살았다. 하여튼 그렇게 올라서니 나 좀 봐 주십사 하는 산악회의 리본이 티베트의 룽다(風馬: 바람의 말)처럼 바람에 말을 걸고 있다.

▲ 산악회의 표식 리본이 바람에 말을 걸고 있다.

드디어 영국사 초입 물경 천삼백 살의 은행나무가 수많은 시대의 단상들을 나이테에 새기고 서 있다. 이 나무는 독특한 이력이 있다. 아래로 쳐져 땅에 닿은 나무에서 새로운 나무가 돋아났다. 오로지 씨앗으로만 발아하는 은행나무가 꺾꽂이한 것처럼 생명을 잉태한 것이다.

▲ 높이가 30미터에 이른다. 연륜만한 체형에는 시대를 읽는 영험함이 있어 나라가 소란스러우면 나무가 운다고 한다. 이 시절에는 날마다 울고 있어 내게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인지 모를 일이다.
불가해한 자연 앞에 한 동안을 눈을 팔아본다. 만세루를 거쳐 앞마당에 이르니 보리수나무 청량하고, 삼층석탑은 소담하게 하안거를 하고 있다. 신라 문무왕 때 원각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던 이 절은 만월사였는데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국청사로 개명을 한다. 그리고 홍건적의 난을 피해온 공민왕을 모시면서 국가를 강녕하게 한다 하여 영국사로 명명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화순군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 천태산은 운주사가 있는 도암면에 자리하고 있고, 공민왕은 태후와 함께 화순의 나복산으로 피신을 와서 1년여 동안을 생활하며 어머니의 품과 같은 산이라 하여 모후산으로 개명하였다.

운주사는 두 해전 큰 불이 나서 사찰의 승려는 물론 근동의 공무원과 주민들이 힘을 합해 화마를 극복했는데, 영국사 또한 수해 전 화마가 천태산을 휩쓸 때 스님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지켜낸 절이기도 하다. 불(火)의 마음을 불심(佛心)으로 극복한 것이다. 여행길에서 조금만 신경을 써 보면 내 동네의 산하가 갖춘 내용과 형식이 그곳에서도 관통되고 있다는 것을 비교할 수 있다. 이 또한 즐거움이고 한 백성임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대여섯 명의 방문객에게 절집의 내력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찬 하시는 스님의 말씀이 귓전에 와 닿는데 에둘러 피하고 두기의 부도와 원각국사비가 있는 언덕을 찾았다.

▲ 석종형 부도의 형태는 그야말로 종의 형식으로 존귀해 보이지만 돌의 재질이나 색감이 시선을 압도하는 경우를 많이 본 내게 아쉬움이 많아 보이는 스님의 무덤이었다.
국사비는 비신을 받치는 귀부가 너무나 크고 비문은 엷은 점판암에 마모가 심하고 지붕과 같은 이수는 둔중한 무게를 갖추고 있다. 비대칭적인 모양새임에도 육중함에 눈길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다. 고려의 장대한 스케일이 이 비석에도 닿아 있음을 느낀다. 후면에 있는 한기의 부도는 여주 신륵사의 보제존자 석종형 부도처럼 종과 같은 모양을 갖추고 있다.

석종이 갖는 형태의 아름다움에 비해 섬세함이 떨어져 고려 말기나 조선 초의 것으로 추정하고 주인은 알 수 없다. 그 옆에는 원구형의 부도가 함께 있다. 형식이나 기교가 더욱 떨어지는 것에서 시대가 조선으로 내려왔음을 확인해 본다. 불교의 위상이 유교와 대립하는 상황에서의 조형의식의 변화가 한 눈에 읽히는 대목이다.

그렇게 절집을 뒤로하고 드디어 밤 막걸리를 구하러 나섰다. 사하촌의 점방들이 하나 둘 불이 꺼질 때 내가 찾던 집도 문을 잠근다. 인기가 좋아 진작에 떨어졌다고 한다. 1년 전의 맛을 상기하며 입맛만 다시는 내게 돌아오는 길은 멀고도 지난해 보였다. 하지만, 금강으로 지는 노을이 그나마 방랑자의 마음에 횃불처럼 따스하게 뎁혀 주었다.


▲ 영동의 양산팔경을 담고 있는 금강으로 지는 노을과 산들의 실루엣이 포근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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