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불의 입향을 상상해 보며
천불의 입향을 상상해 보며
  • 전고필
  • 승인 2008.10.22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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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군 도암면 운주사

▲ 계절도 타고 세월도 타고 보살님의 따스한 눈길도 타는 한 가족 같은 부처님 일가의 머리 위해 이룩해야 할 세상이 풍찬노숙에 찢기면서도 우뚝 버티고 있다.

화순군 도암면 용강리 운주사 계곡, 어느 사이 계단처럼 들어서 있던 논두렁은 자취없고 나락대신에 잔디밭이 등장했다.

논 위에 불쑥 솟은 탑들은 가지런히 정돈 되었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굴러다니던 불상의 두상이나 신체들은 다북쑥처럼 모아져 있으며, 일주문이 들어선지 오래다. 새롭고 낯선 변신 앞에 그 공간을 비밀스럽게 찾아왔던 형들은 이제 어디로 갔을까?
  
그럼에도 천불천탑과 끝내 일어서지 못하게 된 와불이 꿈꾸었던 세상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여전히 진행형이며, 그들에게 운주사는 성지 이상의 그 무엇이다.
  
그런 성스러운 공간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은 무기력해진다. 찾아서 실망하느니 상상 속에 누운 와불을 세우고 다시 눕혀 놓는 법이 더 낫다는 것을 아는 지혜이리라.
 
속된 나는 일주문 앞 차나무가 꽃봉오리를 터뜨리는 날 그곳을 찾았다. 벌들은 힘차게 차꽃을 파고들고, 가을 햇볕은 모자하나 쓰지 않은 내 얼굴에 따끔거린다.
  
하지만 저기 담벼락에 졸듯이 기대고 있는 불상들은 이미 햇볕에 그을려 원래의 얼굴색을 복원해 내기 어렵다. 모여진 자태에 따라서 가족 같고, 연인 같고, 부부 같고, 등 돌린 형제 같아 보이는 그들의 알콩달콩한 모습은 자체만으로도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올 것 같다.
  

▲ 겨우 반쯤 일어선 와불을 배경으로 도암면 사람들이 누대로 내려왔던 고유한 삶의 문화를 복원한 집짓기 놀이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끼를 피워 올리고 다시 비바람에 풍화되며 형체를 짐작하기 어려운 것들의 풍장은 갈수록 늘어나는 느낌이 든다.
  
대저 저 들은 어떤 사연을 지녔기에 라고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이미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끝내 일어서려고 했지만 어이없게도 사미승의 어깃장이 던져 놓은 닭울음 소리는 다른 생각으로 전이를 막아서고 있다.
  
더 이상의 상상이 허락되지 않는 공간은 잔인한 법인데 운주사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다시 그날 밤 도선국사가 내려오고 그와 더불어 천지공사를 수행할 신인들이 동행하면 나는 기꺼이 사미승이 되고 싶다. 모진 형틀에 매달리고 인두가 살 속에 다가와도 끝내 닭과 같은 짐승은 떠 올리지 않으리라 굳은 다짐까지 겹쳐 본다.
  
운주사와 앞 마을의 관계를 다 아는 듯, 용강리에서 오지 않았음에도 용강리에서 왔다고 하며 입장요금을 내지 않은 아주머니들의 즐거운 나들이가 엿보인다. 늦게 소피를 보고 온 다른 여인네가 낸 요금이 내 몸의 살점 떨어져 나간 듯 아까운 돈이라 공격한다. 불경한지고 라고 생각하지만 그 분들 예의는 발라 그 와중에도 불상과 탑이 눈앞에 스치면 머리를 조아리고 두 손을 비벼 대며 무언가 중얼거린다.
  
매표소의 손을 거쳐 시주하는 것 보다는 직접 불전함에 돈을 넣는 것이 더욱 부처님께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을 아시는 분들의 현명함 아닌가 상상해 본다. 화염 무늬가 광채를 발하고 있는 비로자나불을 지나니 탑같은 집 안에 두 분의 불상이 등을 대고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응시하고 계신다.
  
본디 문이 있었던 것을 떼어낸 흔적이 남아있고 달아난 문짝 대신에 전설 한 자락 떠오른다. 공양을 드리기 위해 그 문을 열고 닫을 때 나는 소리가 하도나 커서 당시 신라의 수도 계림에서는 꼭 이때면 중신 한 명씩의 목숨이 하늘로 가곤 했다고 한다.

이에 놀란 왕이 무슨 일인고 알아보니 도선이라는 중이 세상을 뒤집기 위해 천불천탑을 만드는데 그 곳 쌍감불의 신통력이 빼어나 일어난 현상이라고 한다.
  
왕은 진노하여 도선의 부인으로 하여금 그 문짝을 제거하라 명했다고 한다. 도선의 부인 이 부름 받잡고 문짝을 떼어내어 영광 칠산 앞바다에 버리고 그 후론 도선의 영험함도 별반 소용없었다는 슬픈 전설이 거기 남아있었다.

그렇게 이르다보니 걸음은 거기에 멈춰서서 공사바위나 명당탑이나 와불이나 칠성바위 쪽으로 운신하기 어려워졌다. 다시 되돌아오며 형체가 작고 문드러진 것들에 눈을 맞추니 성치 못한 이 땅 민초들의 몸들이 거기 있었다.
  
나부끼는 플래카드를 보니 11월1일부터 2일까지 운주문화축제를 한다. 천불에 턱도 없이 모자란 이곳이 천불천탑의 성지가 된 것에는 근동의 모든 바위안에 들어 있는 불성과 선량한 이곳 사람들의 불심까지 더 한 것 아닐까 란 상상을 가지며 절정의 성지에 편입은 그때로 밀쳐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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