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해방구에서 혁명의 코뮌을 봤다”
“광주 해방구에서 혁명의 코뮌을 봤다”
  • 김경대 기자
  • 승인 2008.06.18 13: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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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인디저널리스트 류이인렬씨

역사의 수레바퀴는 오늘도 돌고 있다. 28년 전 통한의 회군이 있었던 서울역을 지나 시청 앞 거리에 섰다. 폭압과 폭정의 80년이 지나고 6월 항쟁의 분수령을 넘은지 벌써 20년이 지났다.

오늘 이 거리에는 재치 있고 발랄하며 자신의 의사표현을 마음껏 발산하는 중고생들이 촛불하나로 모여 새 역사를 이끌고 있다. 젊은 시절 온몸으로 민주주의를 외쳤던 이들은 이제 아들딸의 손을 잡고 새로운 표현방식에 기꺼이 동참하고 있다.

항쟁당시 서울대 국문과 4학년이며 시위주동 혐의로 수배된 류이인렬(54)씨를 만나러 가는 서울의 풍경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는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거대 언론권력을 무력화시키는 IP통신과 동영상을 결합한 인디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다.

▲ 인디저널리스트 류이인열씨. 왼쪽 위 사진은 수배자 시절 류씨.

형사와 싸워 이룬 서울대 최초 마당극 ‘허생전’


“나는 광대입니다.”
1975년 서울대 관악캠퍼스가 세워지고, 선배들과의 맥이 끊어진 그곳으로 등교를 시작한 75학번이다.
75년 5월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어 폭압적인 학내 상황에서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소규모 자생조직들이 다양하게 생겨난다. 16개 단과대학에 연극회가 결성되고, 이를 결집하는 총연극회에 류이인렬이 있었다.

1975년 겨울, 작품 ‘파수꾼’으로 준비된 공연은 학내에 주둔한 중앙정보부 담당관에 의해 연극 취소결정을 받았다. 이에 분개한 그는 중앙정보부 담당자를 만나 대판 싸웠다.

그러나 이미 취소된 공연은 다시 올릴 수 없는 상황. 한발 물러서 내년 정기공연도 취소할 경우 서울대 내 16개 연극회의 세를 규합하여 저항하겠다고 협박(?)하며 첫 공연의 꿈을 접었다. 이듬해 ‘허생전(이상우 연출, 류이인렬 기획)’을 해학적으로 재편하여 무대가 아닌 야외 마당에서 판을 벌렸다.

5개의 솥단지에 기름을 붙고, 그곳에 불을 붙여 횃불을 밝히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극의 형태로 인해 중앙정보부 담당관과 또다시 부딪혔다. 경찰은 횃불을 철거하고 전등을 가설해주었다. 그와 연극반 동료들은 긴 대나무 장대를 가져와 전등을 모두 부셔버렸다.

그리고 마당극은 강행 되었다. 극을 관람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스크럼을 짜고 정문을 향했다. 다분히 의도적이었지만 겉으로는 자연발생적인 시위였던 셈이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운동사와 예술사에서 광대(예술가)의 역할에 대해 중요하게 재조명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학생들의 집회가 원천봉쇄 된 상황에서 광대들의 역할은 대단했다. 77년에는 학회중심의 ‘신채호와 이광수’심포지움에 연극적 요소를 가미하여 재미를 더했다. 친일파 이광수와 무산자혁명을 외친 신채호의 이론적 대립을 극화한 것이다.

본질적 의도는 당시 유신시대를 비판하며 무산자혁명선언을 알리기 위한 방도였다. 엄혹한 시대에 그렇게라도 하여 인식의 공감대를 확대하려했던 단상들이다.

또한 돌발적인 시위로 인해 학내의 진보세력이 무작정 잡혀가는 것을 막기 위해 계획적인 시위를 준비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4학년을 중심으로 시위를 주동하는 사람의 순번을 정해 감옥을 가는 것이다.

당시 서울대의 문화패에서도 유인택이 먼저가고, 성 욱이 가고, 류인인렬의 순서가 왔다. 학내 상황에 맞춰 늦어진 순서는 77년 광화문 연합시위에 이어 78년 전체 서울대학연합조직으로 발전해 나갔다. 마침내 서울의 7개 대학 연합시위가 조직되었고 그는 이로 인해 끌려갔다.

주대환, 황인성 등과 함께 긴급조치 9호위반, 시위주동이다. 직속가족 외에는 면회가 일체 거절되던 당시 학교 동기와 옥중에서 결혼하고 결혼식은 재소자들에게 국수 돌리는 것으로 대신했던 그는 9개월의 형을 살고 출소했다.

▲ 서울대 재학시 연극반으로 활동하며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류이인렬씨는 노동운동과 아웃사이더 언론인을 거쳐 지금은 인디저널리스트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류씨는 “80년 광주가 엄혹한 독재치하에서 차별 없는 세상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노동의 횃불’로 민주화의 봄을 맞다.

1979년 8월 YH무역(김경숙 사망)여공사건으로 대표되는 전국 노동자들의 저항과, 정유파동에 기인한 경제파탄, 그리고 부마항쟁은 18년 박정희 독재의 종말을 고한다.

마침내 민주화의 봄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겐 활기가 넘쳐난다. 류이인렬씨를 비롯한 당시의 광대들은 겨우내 준비한 역량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문학패를 중심으로 80년 3월 ‘김지하 문학의 밤’이 서울대의 정적을 깨트렸다.

연이어 4월 YH사건에 기초한 정치마당극 ‘노동의 횃불’이 공연에 올랐다. 공연이후 곧바로 학생시위로 이어지는 쾌거를 올린다. 전국대학 순회공연 요청이 쇄도하고 가는 곳마다 공연이후 자연스럽게 민주화시위로 이어진다.

전국 공연 중 한곳인 계명대에선 계명대 사상 최초의 횃불시위를 이끌기도 했다. 이로 인해 출소한지 얼마 안 된 류이인렬은 5·17 쿠데타로 또다시 수배자가 된다.

길고 긴 겨울, 착실하게 준비한 당시의 서울대 문화패는 전투적인 투쟁 노선을 견지한 반면 학생지도부는 온건한 양상을 갖게된다. 학생지도부는 앞서가는 문화패에게 자제해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하고, 탄압의 빌미를 줄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대중의 욕구는 불출하는데 이를 담아낼 지도부는 다소 소극적인 노선을 견지한것이지요. 통한의 회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5·15(서울역)회군도 이미 예견된 것이지요. 광대인 나로서는 신나는 마당이었어요. 광대는 관객을 만나 그들이 호응해 줄때 가장 행복해요. 한마디로 감격이었지요.”

당시 학생회에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자며 농성만 풀지 않았다면 광주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충만한 감격이 일순간 정지하는 그날, 5월 15일 그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과 활동가로서의 부끄러움, 그리고 나약함까지 밀려왔다고 했다.


“학생과 시민에게 기대와 희망을 주어야 하는데 이것이 깨진 것이지요. 한마디로 따라갈 깃발을 잃어버린 것이에요. 당시 전남대 학생지도부는 미래를 준비하는 방향을 만들어 놓았어요. 전국에서 유일하게 다수의 시민과 학생이 상황에 대처하는 방안을 마련한 것이지요. 5월 16일 도청 앞 민주화성회에서 만약 계엄령이 확대되면 오전 10시에 전남대 정문에서 만나자는 약속이었지요. 어찌보면 아무것도 아닌 약속이지만 이것이 향후 나아갈 방향을 정한 것이지요. 계엄령에 저항하는 최소한의 대중과의 약속, 서울엔 그것이 부족했지요. 일부 활동가들끼리 상황을 예견하고 약속하기도 하였지만 10만의 다수 대중과 함께한 약속은 아니었지요. 서울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광주에 대한 부채감을 갖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예비검속이 시작되는 5월 17일, 류이인렬은 본능적으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집 근처에 도착하여 집에 전화를 거니 이미 경찰이 와 있었다. 급히 몸을 피한 곳이 충북 청주의 무용가 강혜숙 선생 집이었다. 그곳에서 본 TV에는 자신이 네 번째에 수배자로 노출되어 있었다.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자신의 모습은 그곳에서 오래 머물 수 없게 만들었다. 밤마다 군인들이 길거리에서 위력시위를 하던 당시의 청주상황이었다. 그는 당시 청주의 기자였던 조 선배의 도움으로 정신병원으로 들어갔다.

아이러니하게 그는 그곳에서 학생운동하다 군인의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고 정신이상이 된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참혹한 어두운 시대였다.

검문검색이 완화 될 즈음 다시 서울로 상경한 그는 단편적으로 들려오는 광주의 참상을 듣게 된다.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상황, 그는 등사기에 철필로 긁은 유인물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주변의 착하고 좋은 여성친구들, 연극하며 만난 친구들이 유인물을 배포해 주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청년연합(의장 김근태)에 가담하여 소극적이나마 경찰을 피해 유인물을 뿌리는 등 수배중임에도 활동을 시작했다.

81년 가을, 끊임없는 학생들의 시위로 인해 군부는 유화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어지고, 자진출두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광대로 연극만 했다고 우겨 길고 긴 수배는 마감되었다.

▲ 류이인렬씨가 인디학교 아이들에게 ‘읽어버린 우리 창세신화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강연을 펼치고 있다.

광주 5월은 새로운 삶을 요구해

광주 5월은 당시 활동가들에게 수많은 학습과 논쟁을 안겨주었다. 사회성격 논쟁으로 대표되는 학림, 무림 논쟁과 민족문제와 계급문제, 그리고 당면한 투쟁의 방향에 이르기까지 논쟁과 실천의 연속이었다.

원본 자본론을 구입해 강독하고 체제에 대한 분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에 맞지 않는 이론논쟁은 방향을 잡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광주는 모든 것을 이야기 했어요. 혁명의 코뮌을 그냥 보여준 것이지요. 해방구가 된 5일간의 광주는 이상을 현실로 바꿔놓았죠. 통제된 독재사회에서 차별 없는 세상을 광주가 보여준 것이지요.”

그는 광주항쟁에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결정했다.
“문화패 활동을 하며 ‘두레공동체’를 공부해요. 채희완선배가 조직한 ‘한두레’로 광주를 모태로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광주는 미래사회의 대안을 여지없이 보여주었고 당시의 우리에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죠.”

이후 광대로서의 삶을 접은 그는 노동운동에 투신한다. 노동자들의 자치조직을 꾸리는데 지원하고 함께하며 오랜 세월을 산 그는 민중당 창당에 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하고, 합법적 진보정당 활동을 위해 전국노동자당 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광대’로 시작된 그의 활동은 다시 광대의 삶으로 되돌아왔다. 현장 노동자들과의 만남에 춤과, 연극으로 큰 힘을 보태주기도 했다.

“미디어에 관심을 가진 것은 내가 광대이기 때문입니다.”
현 활동과 관련해 묻자 그는 변화된 현실을 이야기 했다. 언더그라운드 언론인으로 활동하는 그는 시대적 요구와 필요성으로 자연스럽게 시작했다. 그 계기는 박광수 감독이 준 8mm카메라로 영화를 찍어보던 78년 경의 활동이 기초가 되었다.  현재 인디학교는 봉사의 개념을 갖고 진행하고 있다.

“옛날 미디어는 노래였어요. 이후 활자가 대신했고 지금은 급속하게 영상으로 재편되고 있지요.”
인디저널리스트로 살고 있는 그는 요즘 신난다고 했다. 네티즌이 정당보다 더 강한 여론을 형성하고 스스로 언론의 주인으로 일어서고 있다고 했다. 중고생이 주도하여 시작된 지금의 촛불집회 이면에는 동영상과 와이브로가 결합된 IT의 천국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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