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이 씌지 않았으면 못했을 일”
“귀신이 씌지 않았으면 못했을 일”
  • 김경대 기자
  • 승인 2008.05.14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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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문국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지난 2007년 5월 12일 본지는 1980년 5월 항쟁과 관련하여 최초로 수배된 수배자명단을 독점 보도한 바 있다. 보도 이후 자료의 희귀성과 높은 역사적 가치, 그리고 수배 대상자들의 삶의 궤적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도 잇따라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게 되었다. 당시 취재 역량의 한계로 인해 명단 공개와 유명인을 중심으로 발표되었던 것을, 이번 기획에서는 지난해 보도되지 못한 수배자들을 중심으로 취재를 계획하게 됐다.
광주민중항쟁의 또 다른 피해자였던 이들이 어떠한 과정으로 수배자가 되었고, 수배 이후 검거되기까지 어떻게 활동하였으며,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으며 지금은 무엇을 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한국 현대사와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발견할 것이라 확신한다. 또한 광주항쟁의 역사적 의미에 또 하나의 주춧돌을 올리는 결과라 생각한다.
지난해 6월 27일 당시의 수배자 윤한봉씨가 타계하는 등, 30여년이 흐른 역사와 함께 수배대상자들 중 일부 인사들이 사망하기도 해, 보다 빨리 구술 및 채록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도 기획취재를 서두르게 된 이유이다.
전체 68명의 수배자 중 사망자를 제외한 모든 수배자를 인터뷰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나, 지면 등 몇 가지 한계로 인해, 10여명을 중심으로 전체를 아우르는 방식으로 취재코자 한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코흘리개 꼬마아이 때부터 6·25노래를 읊조리며 반공이데올로기는 곧 진리인 줄로만 알고 살았던 이들에게 80년 5·18은 다시 한 번 잊을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동족끼리 전쟁을 벌인 것도 끔찍한 일이었지만 국가권력에 의해 국민이 학살됐다는 충격은 도무지 잊혀지질 수 없는 공포 그 자체였다. 그날의 상처로 살아남았어도 온전히 제 목숨이 아니었던 이들은 광주에 빚진 영혼의 채무를 갚기 위해 이후의 삶까지 저당 잡히며 일생을 뒤척여야 했다.

특히 지난해 발굴된 5·18 관련 수배자 68명의 경우는 대부분 암흑과 같은 군사독재의 터널을 헤쳐오면서 한국 민주주의사를 개척해 온 이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사진 속 네모는 28년 전 수배당시 모습.
문국주(5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80년 이후 열정을 다해 활동했던 경험을 “귀신이 씌었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더 구체적으로 “광주에서 죽은 귀신들의 혼이 빙의한 것처럼 ‘무모하게’ 미친 듯이 덤벼들었었다”고 고백했다.

한국최초의 근대식 중등 교육기관인 배재학당 바로 옆에 위치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건물 3층에서 지난 6일 문 상임이사를 만났다.

기자 일행을 반갑게 맞은 문 상임이사는 28년 전 수배자 명단 속 인물인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변해 있었다. 그도 그럴 만 했다. 수배전단 속에서는 잘 벼린 칼날 같던 스물여섯 청년이 오십 줄에 접어든 중년의 사내가 되었으니.

문 상임이사는 가져간 수배전단지를 보고 예전의 감회가 떠오르는 듯 동지들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어나갔다.

“○○는 죽고, ○○선배는 부산에 있고 아, 이 친구도 여기서 보네?”

대학 2학년 때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

문 상임이사는 전남 화순군 도곡면 천암리에서 5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광주일고를 거쳐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것이 1973년. 그 이듬해 4월 바로 전국의 대학생 180여명이 구속기소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다.

당시 정부는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이들에게 전국적 민중봉기를 획책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이해찬 전 국무총리, 황인성, 나병식 등이 다 그와 함께 구속됐던 서울대 문리대 출신들이다. 

다행히 75년 2월 대통령특별조치에 의해 형집행정지로 석방됐으나 제적생 신분인터라 살 길이 막막했다. 일부는 노동현장 투신을 준비했고 나머지는 생계를 위해 출판사나 번역 일을 하면서 근근이 살아갔다.

그러다 78년 5월 12일 유신치하 최초의 공개운동단체인 민주청년인권협의회(민청협)를 결성하고 문 상임이사는 총무를 맡았다.

YWCA 위장결혼 사건. 10·26 총성과 함께 유신독재가 종말을 고했으나 권한대행 최규하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한 후 개헌을 하겠다고 했다. 불길한 조짐이었다. 민청협을 중심으로 가짜 신랑신부를 등장시켜 반대집회를 열었고 당연히 그는 또 수배자 신분이 되었다.

“말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

▲ 문 상임이사는 당시의 수배전단지를 들여다 보며 28년 전 그 때로 돌아간 듯 깊은 감회에 젖었다.
그 다음은 우리가 다 아는 대로다. 80년 5월 15일 대학생들이 서울역 광장에서 캠퍼스로 돌아간 다음 17일 계엄령 확대, 18일 광주 전남대에서 강경진압, 그리고 피의 광주학살….

어떤 연유로 5·18 수배자 명단에 올랐는가를 묻는 질문에 그는 “어떤 활동을 했다고 말한다는 것 자체가 광주에서 돌아가신 분들께 영 부끄럽다”고 입을 닫았다. “그분들의 용기있는 행동과 명예로운 죽음은 어마어마한 일이어서 이것 했노라 저것 했노라 주워섬기기가 너무나 부끄럽다”는 말만 되뇌었다.

수배자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등사기로 유인물을 만들어 야음을 틈타 주택가 골목에 뿌리며 광주의 진실을 알려내는 일이 전부였다. 고립된 광주를 어떻게든 알려내야 했으나 신군부의 총칼은 아직도 서슬이 퍼랬다.  

그는 결국 1980년 12월 9일 광주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주도한 정순철의 일본 밀항을 도왔다가 박계동(전 국회의원) 등과 함께 추적이 강화돼 82년 2월 서울에서 검거된다. 그러나 광주항쟁의 뒤끝 유화국면을 맞아 불구속 기소로 풀려난다.    

82년부터 88년까지는 천주교 사회운동에 줄곧 몸담았다. 한국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간사로 활동을 시작해 천주교 사회운동협의회 사무국장 등을 지냈다.

이 때 주로 했던 일은 시국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이들의 변호사를 선임하거나 옥바라지 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94년에는 <공동선>이라는 카톨릭 잡지의 발행인을 맡기도 했다.

이후 2000년부터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를 준비하고 초기에 사무처장으로 있으면서 관련업무를 담당했다. 그가 말하는 기념사업회의 창립 배경은 이렇다.

“1999년 1월부터 진보운동 진영에 크게 세 흐름이 있었죠. 소설가 황석영을 중심으로 민주화운동 기념관을 짓자는 쪽과 김상근 목사, 이창복(전 국회의원) 등을 중심으로 사료정리 사업이 우선이라는 쪽, 또 김중배(전 한겨레 대표이사)를 중심으로 6월 사랑방을 만들자는 쪽. 결국 세 그룹이 합쳐서 설립준비를 하게 됐죠”

때맞춰 들어선 김대중 정부의 지원으로 99년 10월 기념사업회가 창립하게 된다. 

2002년 초 시민방송 R-TV 상임이사를 지내다 2004년 12월부터 다시 상임이사로 재직하고 있는 그는 기념사업회의 역할과 관련,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심화발전을 위해 교육사업이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정리함으로써 어떤 교훈을 얻고 심화발전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불어 국제협력 교류사업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민주화운동의 자부심을 전 세계적으로 퍼뜨려가는 사업도 전개하고 있습니다”

자기반성과 폐쇄성 극복이 과제

그는 대선과 총선 이후 진보진영의 침체에 대해서는 줄곧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했다. 민중의 시각이 어리석다고 욕하기보다 정치사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며 자기반성과 폐쇄적 아집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문했다.

문 상임이사는 또 “진보진영 내부를 객관화시키고 진정한 연대와 협력 틀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는 작고한 박현채 선생의 91년 5·18 학술행사에서의 발제를 예로 들었다.

박 선생은 당시 “5·18 당시 폭발적인 민중적 분노를 적극적으로 수렴해 포지티브한 힘으로 전환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깊은 반성이 있어야 한다”면서 “옳고 그름의 시시비비를 폐쇄적 논의로 가져가기보다 역사적 추동력을 만드려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지난 10년의 민주화 정권에 대한 이러저러한 비판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제도권으로 진입해서 운동의 물을 흐렸다는 지적보다 시민운동, 민중운동 모두 역사의식과 철학의 부재로 메인스트림을 만들려는 노력을 게을리한 점을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마추어리즘에 빠져 시행착오만을 거듭하다 국민의 외면을 받았다는 것이다.  

올해 28주년을 맞는 5·18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도 그는 “광주민중항쟁에서 희생된 시민들의 숭고한 정신에서 교훈을 찾으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면서 “가까운 사람들끼리 부터서라도 윤한봉 선배 등 당시 관련인들의 공과를 논해보자”고 제안하며 반목과 갈등으로 갈라진 광주부터 화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결국 진보진영의 결속 문제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우리 자체 역량을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대안없이 비판만 해서는 국민들로부터 무장해제 당한 우리 입장에서 반사이익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한 번 등 돌린 국민의 관심과 애정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어려운 과정이겠지만 자기반성을 통해 자체역량을 키워야 합니다.”

그는 본인부터서라도 책임감을 느끼고 진보운동진영의 단결과 역량결집에 힘을 보탤 계획이라고 말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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