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승자는 총과 칼이 아닌 문화와 정신
역사의 승자는 총과 칼이 아닌 문화와 정신
  • 조순경(STORY WON회원)
  • 승인 2008.03.20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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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곡성, 골골마다 스며있는 애국과 충절

 

순서
1.민족정신이 흘러넘치는 보성의 2번국도(上·下)
2. 황룡강에 흩뿌려진 선비정신
3. 화순 땅에 펼쳐진 충과 효
4. 문예와 정치와 충절이 평등한 무등산
5. 담양. 학문의 끝은 어디인가?
6. 곡성, 골골마다 스며있는 애국과 충절
7. 여수, 진남관에서 충무공을 사색하다
8. 혁명의 고향, 해방광주

기행경로
① 용산재 - 곡성 목사동면 구룡리
② 태안사 - 죽곡면 원달리
③ 덕양서원 - 오곡면 덕산리
④ 단군전 - 곡성읍 학정리
⑤ 청계동 - 곡성읍 신기리
⑥ 함허정 - 입면 제월리
⑦ 정재건생가 - 입면 약천리
⑧ 유팽로정려각 - 옥과면 합강리

지난 밤엔 반가운 단비가 내렸다. ‘후두둑’ 지붕위로 떨어지는 세찬 빗소리가 이토록 반가울 줄이야. 오늘 답사일정에 지장을 줄지도 모르는 비였지만, 겨우내 바짝 말라있는 대지에 생기를 불어넣는 비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지난 밤 두어 시간 가량 들리던 빗소리는 이내 멈추었고 이렇게 찾아온 아침은 너무도 상쾌했다. 계절은 어김없이 봄의 문턱에 들어서고 답사 길을 나서며 하얀 매화나 노란 산수유 꽃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본다.

여느 때보다 조금 늦게 길을 나선 이유로 석곡IC를 빠져나오니 11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법, 석곡에서 유명한 석쇠구이집에서 돼지갈비로 요기를 하고 답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입에 척 달라붙는 고기 맛에 술이 없을 수는 없고, 운전자를 제외한 일행은 반주삼아 소주 한두 잔을 나눠마셨다.

석곡을 빠져나와 구례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언제 지나도 상쾌한 길이다. 보성강변을 따라 가노라면 어느새 섬진강과 만나고 그 길을 따라 굽이굽이 가다보면 어느새 내가 자연이 되는 길. 연인들끼리, 가족들끼리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고픈 정겹고 아늑한 길이다.

   
 
  ▲ 고려개국공신 신숭겸의 동상과 그를 기리는 제각과 제단 등이 있는 용산재.  
 
주군 위해 목숨 바친 신숭겸

국도를 타고 내려가다 목사동 다리를 건너면 용산재의 이정표가 보인다. 용산재는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 ?~927)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다. 신숭겸의 본 이름은 능산인데 날아가는 새를 화살로 맞춰 떨어뜨리는 재주를 보고 고려태조 왕건이 내려준 성과 이름이다.

곡성지역에 널리 분포되어있는 평산 신씨의 시조이다. 홍유 복지겸 등과 뜻을 같이하여 태봉에서 궁예를 내쫒고 왕건을 도와 고려를 세운 건국공신이다. 이곳 용산재와 덕양서원을 찾은 이유가 고려의 개국공신이기 때문이라면 그 의미는 초라해진다. 신숭겸이 없었다면 고려의 개국과 태조왕건의 존재가 유구한 역사위에 존재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한다.

서기 927년 공산전투에서 태조왕건은 후백제의 견훤에게 포위되고 만다. 신숭겸은 왕건의 옷과 갑옷을 입고 왕건을 일반군졸로 변복을 시켜 탈출시킨다. 이를 위해 김락, 전의갑, 전의갑 등과 함께 후백제군에 맞서 선두에서 군사를 지휘하고 마침내 최후를 맞이한다.

신숭겸의 목은 참수되어 견훤에게 가고 신숭겸의 주검은 몸뚱이만 남는다. 공산을 빠져나간 왕건은 군사를 정비하여 다시 돌아온다. 몸뚱이만 남은 신숭겸의 주검을 수습한 왕건은 금으로 신숭겸의 머리모형을 만들어 장사를 지내고 장절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주군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신숭겸과, 신하를 위해 다시 돌아와 시신을 수습하고 장사를 지내주는 왕건, 각별한 이들의 충성과 애정으로 고려는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곳 용산재와 곡성읍에 있는 덕양서원은 그의 뜻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워졌다. 지방기념물 56호로 지정되어 있으나 신숭겸의 행적과 정신만큼은 국보처럼 소중한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가 문화재를 아끼고 보호하는 것은 오래되거나 희소가치만을 따져서는 안 될 일이다.

얼마 전에 불탄 숭례문을 다시 복원한다고 하여 문화적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수많은 외침과 내란을 격어 온 역사에서 역사의 혼과 정신이 깃든 사적들이 온전히 남아 있을 수는 없다. 덕양서원이 정유재란 때에 불에 타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기도 하는 아픔을 겪기도 하여, 비록 국가지정문화재는 못되었지만 이 역시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지방기념물이라 하여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역사에서 배워야 할 중요한 것은 건물이 언제 지어졌고 내부의 구조가 어떻고 하는 고고학적 개념이 아닌 유적이 내포하고 있는 사연과 정신에 있기 때문이다.

저항시인 조태일이 나고 자란 태안사

▲ 태안사는 2km에 달하는 시원한 계곡과 아름다운 풍경으로 더 유명한 곳이다. 사진은 경내 입구에 위치한 호수.
용산재를 빠져나와 다시 보성강을 따라 내려갔다. 여기서부터 섬진강 일대를 지나다 보면 플라이 낚시를 즐기는 분들을 가끔 목격하곤 한다. 이국적인 느낌이지만 잔잔한 강물의 흐름과 주변의 풍경에 섞여 제법 운치있는 풍경을 만들어 준다. 이른 봄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강 주변을 살펴보지만 아직은 이른 봄인지 그들을 만날 수 없었다.

동리산 자락에 위치한 태안사는 입구에 접어들어 차량으로 한참을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절이다. 도로의 좌우로 보이는 숲과 계곡은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깨끗이 씻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고로쇠나무, 떡갈나무, 단풍나무, 소나무 등 갖가지 나무들로 우거진 산세와 계곡물은 봄이면 상큼한 신록이, 여름이면 울창한 숲과 시원한 계곡물이, 가을이면 찬연한 단풍이 수많은 사람들을 유혹하는 곳이기도 하다. 내심 봄기운을 기대하였으나 아직은 이른 탓인지 정겨운 물소리만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태안사 입구에 다다를 즈음 전태일문학관과 경찰충혼탑을 만날 수 있다. 경찰 충혼탑은 1950년 남북전쟁당시 남하하는 인민군과 사수하려는 경찰과의 전투로 인해 경찰 48명이 사망하여 이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이다. 동족상잔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조태일 문학관은 시집 ‘국토’로 유명한 조태일(1941~1999) 시인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박정희의 군사독재와 전두환 군사쿠테타로 이어지는 70~80년대에 김지하와 더불어 저항하던 저항시인이다. 국토서시를 읽으며 민족과 민주주의에 대해 치열하게 논쟁하고 토론했던 시절을 회상할 수 있는 장소이다. 이번 답사의 주인공은 태안사가 아니라 조태일과 경찰충혼탑에 있으니 신라로부터 이어진 태안사의 역사에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든다.

태안사는 신라 경덕왕 원년(742년)에 중창되어 문성왕 9년(847년)에 혜철 국사에 의해 선종사찰로 개산되었다. 고려태조 때에 혜철대사가 132칸의 대규모 절로 거듭 태어났고 고려 초에는 송광사 화엄사가 모두 태안사의 말사였다고 한다. 경내에는 혜철국사 사리탑, 광자선사탑 등 보물과 문화재가 9점이나 소장되어 있다. 태안사 입구 계곡에 세워진 능파각은 그 위치가 절묘해서 수많은 관광객에게 사랑을 받는 곳이기도 하다.

보성강이 섬진강과 합류하는 압록유원지에 이르러 가는 길을 멈추었다. 벚꽃이 피는 완연한 봄이 오면 상춘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벚꽃길이다. 내일이라도 곧 꽃망울을 터트릴 양 물기를 머금은 벚나무와 강변의 풍경을 담아보기 위해서였다.

곡성군 영운천 변에 위치한 단군전은 단군왕검의 영정을 모신 단군전이 있다. 매년 10월 3일과 3월 15일에 제사를 모시는데, 이곳은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해 애국지사들이 단합하고 협의했던 곳이다. 경내에는 이를 주도했던 백당 신태윤을 기리는 기념관과 3.1운동 기념비가 있다. 다시 길을 잡아 청계동 계곡으로 향했다.
태안사의 계곡처럼 산세가 빼어나고 주변의 소나무가 넓게 우거져 시원한 그늘이 많은 계곡이다. 여름철이면 피서지로 유명한 계곡이다. 이곳에도 선조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 청계 양대박장군이 의병을 모으고 양성했던 청계동 계곡.
임진왜란 당시 고경명 장군의 우부장으로 금산전투에 참가했던 청계 양대박장군이 의병을 모으고 양성했던 곳이 이곳 청계동 계곡이다. 다시 길을 잡아 함허정과 군지촌정사를 둘러보고 정재건 선생 유적지로 향했다.

함허정은 1543년(중종 38)에 심광형이 후학을 육성하기 위하여 군지촌 정사를 짓고, 이 지역 유림들과 풍류를 즐기기 위하여 지었는데, 정자 아래로 반달형의 흐름을 따라 섬진강이 흐르고 주변의 울창한 수목이 풍경을 더하여 그 지리적 위치가 빼어난 정자이다. 시를 짓고 벗과 조우하며 역사를 이야기하던 선비의 멋스러움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 시를 짓고 역사를 논하던 조선 선비들의 멋스러움을 간직한 함허정.
정재건 유적지와 유팽로의 정렬각


정재건 선생의 유적지를 찾는 길은 참으로 어려웠다. 정재건(1843~1910)선생은 1888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 통훈대부까지 벼슬에 오른 인물이다. 1905년 을사오조약이 체결되자 광무제에게 상소문을 올리고 낙향하여 은거생활을 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까지 당하게 되자 유시(諭示)와 고결문(告決文)을 남기고 스스로 칼로 찔러 순절하였다.

망국의 신하로서 구차히 살아감은 의가 아니다.
내 맹세코 명치의 세상에 살고 싶지 않다(정재건의 유시)

월파 유팽로의 정렬각을 마지막으로 답사를 마쳤다. 월파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1592년 4월 20일 전국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인물이다. 고경명 장군과 연합하여 선봉장을 맡았던 월파는 금산전투에서 고경명장군의 퇴로가 막히자 적진으로 뛰어들어 최후를 함께 했다.

월파가 죽고 월파의 발이 되었던 ‘오리마’(검은색 말)는 월파의 머리를 입에 물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월파의 부인 김씨가 이를 치마폭으로 받아안아 장례를 치루고 오리마는 9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울기만 하다 마침내 죽어버린다. 1년 뒤 월파의 기일을 지낸 김씨부인도 자결하고 만다. 마을 어귀에는 오리마의 무덤이 있다.

조총과 칼로 일어선 왜군은 정신과 문화로 무장한 조선을 침탈하였으나 마침내 패망하였다. 을사오조약 이후 36년이나 강점했던 일제 역시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지 못했다. 역사의 승자는 총과 칼이 아니라 문화와 정신임을 일깨워 주는 역사적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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