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과 정신 간데 없이 일 잘하면 실용주의인가
뜻과 정신 간데 없이 일 잘하면 실용주의인가
  • 시민의소리
  • 승인 2008.03.15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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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학의 성망이 무거웠던 고을
매천과 면암이 흠모한 기정진

순서
1. 민족정신이 흘러넘치는 보성의 2번국도(上·下)
2. 황룡강에 흩뿌려진 선비정신
3. 화순 땅에 펼쳐진 충과 효
4. 문예와 정치와 충절이 평등한 무등산
5. 담양. 학문의 끝은 어디인가?

6. 곡성, 골골마다 스며있는 애국과 충절
7. 여수, 진남관에서 충무공을 사색하다
8. 혁명의 고향, 해방광주


기행경로

① 용산재        - 곡성 목사동면 구룡리
② 태안사        -        죽곡면 원달리
③ 덕양서원      -        오곡면 덕산리
④ 단군전        -        곡성읍 학정리
⑤ 청계동        -        곡성읍 신기리
⑥ 함허정        -          입면 제월리
⑦ 정재건생가    -          입면 약천리
⑧ 유팽로정려각  -        옥과면 합강리

봄기운이 완연하다. 아침저녁으로 찬 기운이 없지 않지만 봄의 기운을 막을 수는 없다.

시절은 바야흐로 국회의원 선거의 복판에 들어선 듯싶다.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 것일까. 지난 대선에서 패배한 여당의 공천쇄신이 연일 화제가 되고 있고, 공천위원장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어둠속에서 빛은 발하는 법. 새 정부와 집권 여당의 행태가 보기에 딱할 정도로 가관이다. 군 입대비리 의혹, 탈세 의혹, 위장전입 의혹, 이력위조 의혹, 뇌물수수 의혹, 땅투기 의혹….

도대체 정부의 각료를 선출하는데 청렴하고 깨끗한 사람 세우기가 이렇게 힘이 들까? 며칠 전 MBC의 100분 토론은 방송사고감이다. 땅 투기 안한 사람이 바보라니. 홍모 교수가 속한 대학의 수준이 의심스럽고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하기야 나라의 총리가 강연 몇 회 하고 교수로 역임했다 이력에 기재하는 시대이니‥‥‥.

담양으로 접어들어 아직까진 앙상한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길을 지났다. 짧은 기간에 유명해진 이 길을 지날 때면 나라의 근현대 성장과 닮은꼴임을 확인하곤 한다. 빨리빨리 잘 자라고 보기는 좋은데 쓰임새는 별로인 메타세콰이어. 한국의 현실과 참 많이 닮았다. 

조상의 학문을 실천한 고광순

   
 
  ▲ 한말 의병장 고광순을 기리기 위해 최근 담양군 창평면에 지어진 기념관.  
 
창평면 유천리에는 최근에 새로 지어진 고광순(1848-1907)기념관이 있다. 호는 녹천. 창평면 유천리 태생이다. 창평 고씨는 임진왜란 때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삼부자가 왜적과 싸우다 사망하여 삼부자를 불천위로 모시고 있다. 고광순은 고인후의 제사를 모시는 봉사손이다.

조상의 피를 물려받은 고광순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거병하였다. 이후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을사오조약에 저항하여 1907년 1월 24일 고재량 등의 지사들과 함께 2차 거병하여 능주의 양회일, 담양의 이한선, 장성의 기삼연 등과 연합하여 일제에 저항했다.

일제는 고광순을 고충신 또는 비하하는 말로 거괴라 부를 정도로 의기를 떨친 인물이다. 일제의 의병토벌이 거세지고 저항의 힘이 약해진 고광순은 창평의진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향했다. 축예지계, 근거지를 두고 투쟁하는 전략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같은 해 10월 9일, 고광순의 주력은 섬진강 화개동의 일제 군경을 기습하러 출동하고, 근거지인 구례 연곡사엔 10여명의 의병만이 있을 즈음 일제의 대대적인 토벌대가 연곡사를 침탈한다.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고광훈과 고광문을 탈출시키고 고재량과 함께 전사한다. 의연하게 생을 마감한 고광순을 애통해 하며 매천황현은 그의 무덤 앞에 추모의 시를 바쳤다.

 연곡사의 봉우리마다 숲은 울창하기 그지없네
 나라위해 한평생 숨어 싸우다 목숨을 바쳤구나
 전마는 흩어져 논두렁에 누워있고
 ‥‥‥ 중략 ‥‥‥
 홀로 서풍을 향해 뜨거운 눈물을 흘리니
 새무덤이 국화 옆에 우뚝 솟았음이라.

* 매천 황현선생은 梅泉野錄(매천야록)등 일제 침략의 생생한 현장 기록을 남기고 나라가 망하자 순국했다.

 창흥의숙과 춘강(春崗) 고정주(高鼎柱)

▲ 창흥의숙을 세워 인재양성을 꾀했던 고정주의 생가마을을 남극루에서 바라본 전경.
고정주는 구한말 규장각(奎章閣) 직각(直閣) 벼슬을 지냈다. 의친왕 이강의 비서실장을 지내는 등 학문의 수준이 남달라 황자전독에 임명되어 왕자에게 경전을 가르치던 인물이다. 1905년 을사오조약이 체결되자 낙향을 한 그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인재양성이 중요하다 생각하고 이곳 창평에 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심한다.

1905년 상월정을 지어 고광준, 김성수, 김연수를 가르치고, 다음해엔 영학숙으로 확장하여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1908년 지금의 창평초등학교 자리에 창흥의숙(昌興義塾)을 세워 마침내 그 뜻을 펼쳤다. 한문, 국사, 영어, 일어, 산술 등 전통학문과 서양학문을 겸한 학교였다. 창평객사 건물을 수리하여 사용하던 창흥의숙은 학비와 점심 모두를 무료로 제공하며 인재를 양성하는데 전념했다. 

고재천(전 전남대 농대학장)과 재필(전 보사부 장관) 형제, 고재기(전 서강전문대 학장)·고재종(전 전남교육감)·고정석(전 산업은행장)·고윤석(전 서울대 부총장)·고광표(대창주식회사 회장), 해방 후 국회의원을 지낸 김홍용·문용·성용 3형제, 우리나라에 최초로 야구를 소개한 박석윤(東京제대 졸업)·석기(일제에 맞선 국악인) 형제 등이 창평학교 출신이라고 한다. 3형제 모두 국회의원을 지낸 김홍용·문용·성용은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의 외숙들이다. 이회창도 창평학교에서 2~3년간 재학한 바 있다고 알려져 있다.

임란으로 불탄 역사 잇는 미암일기

▲ 연계정에서 바라본 모현관 전경. 승정원일기가 불타 없어지자 선조의 일대기를 일기로 남긴 미암 유희춘의 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1959년에 지어졌다.
일기란 한사람의 행적과 견해를 적은 지극히 개인적인 글이다. 그러나 그 개인이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모시고 수행하는 지위에 있다면, 그가 쓴 일기는 단순히 개인의 것으로 치부될 수는 없는 법이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왜군이 궁궐을 침범하고 임금의 몽진이 평양성까지 흐른다.

승정원일기가 불타 없어지고 선조의 행과 업적이 모두 사라졌다. 선조 원년으로부터 10년 동안의 기록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미암 유희춘(1513-1577)의 미암일기와 율곡 이이의 경연일기 덕택이다. 중종 6년(1537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다음해에 문과에 급제한 유희춘은 홍문관수찬 무장현감 등 여러 관직을 거치며 능력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을사사화로 파직되고 양재역벽서사건으로 유배된다. 제주도와 함경도에서 무려 19년 동안 유배에서 풀려나지 못한다. 1567년 부제학으로 복권되어 대사성, 대사헌, 이조참판까지 오른 그는 사후에 좌찬성, 문절공의 시호를 받게 된다.

그의 행적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창평면 장산리에는 미암사당과 모현관 연계정이 세워져 있다. 연계정은 그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고, 미암사당은 사후에, 모현관은 1959년 미암일기와 그의 문집 유품을 보관하기 위해 석조건축으로 지어졌다.

양영대군의 증손 이서의 유언

문일정은 석전 이최선(1825-1883)이 지은 정자이다. 이최선과 문일정이 이곳 창평면 장화리와 연을 맺는 것은 역사를 거슬러 조선 중기로 올라가야 한다. 이최선은 양영대군의 16세손이다. 1507년(중종2년) 대사성 이과, 하원수 이찬, 병조정랑 윤귀수, 손유 등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을 하야시키고 견성군을 왕으로 옹립하는 역모를 꾀한다.

그러나 서얼 노영손의 밀고에 의해 발각되고, 이과, 이찬, 손유는 능지처사로 죽게 된다. 이찬의 형이면은 경상도로, 동생 이서는 전라도 창평으로 유배를 간다. 14년 후 이서는 유배에서 풀리게 되나 상경하지 않고 이곳 창평에 머문다. 그는 유훈으로 ‘내 손은 정치에 나가지 말라’는 말을 남긴다. 역모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했는지 가히 짐작할 만한 대목이다.

이최선은 노사 기정진의 문하에서 40년 동안 수학한 노사문하의 대표적 인물이다. 35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이후 정치활동을 포기하고 향촌에 은둔하며 학문에만 전념한다. 1862년 임술농민항쟁 때에 삼정책 (勉道學, 開言路, 嚴科程)을 상소한 것으로 유명하며, 1866년 병인양요 때에 거병하여 강화도로 향해 대원군을 만난 일도 유명하다. 노사 기정진의 영향으로 그의 학문은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꾀했다.

성리학에서 주리론과 유리론으로 이어지는 철학의 맥은 서양의 유물철학 변증법과 상통함을 알 수 있다. 그 학풍의 맥은 기대승, 기정진, 이최선 등 장성과 담양의 유림철학의 큰 흐름으로 이어진다.

실천이 없는 이론은 진리가 아니다

▲ 대전면 대치리 면소재지 뒤편에 위치한 관수정. 1593년 묵은 이정신이 최초로 지은 것을 이곳으로 이전해 복원했다.
노사 기정진을 모신 고산서원으로 가는 길에 관수정을 들렀다. 대전면 대치리 면소재지 뒤편으로 강물을 따라 거슬러 오르면 우뚝 솟은 산 정상에 서있는 관수정이다. 1593년 묵은 이정신이 최초로 지어 이곳으로 이전하여 복원된 관수정에서 사경의 아름다움에 취해 봄직하다. 이정신은 인목대비 유폐사건으로 귀향하여 수기치인한 사람이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격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던 그는 정치의 일선에 있지 않았지만, 학문의 쓰일 곳이 어디이고 끝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인물이다.

노사 기정진(1798 - 1879)은 화서 이항로와 함께 유리론을 정립한 사람이다. ‘행위와 실천이 없는 관념적 이론은 진리가 아니다’는 것이 유리론의 주요내용이다. 사단칠정논쟁에서 이와 기는 하나라고 했던 기대승의 학문이 발전하여 여기까지 온 것임에 틀림없다.

이 이론은 당시 경상도에 살던 한주 이진상, 경기도에 살던 화서 이항로 등이 비슷한 시기에 주창했던 이론이다. 철학적 이론 논쟁이 무르익어 새로운 철학적 명제를 확립하는 과정을 기정진에게서 만날 수 있다. 헤겔과 포이에르바흐의 철학이 막시즘의 뿌리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기정진의 학문을 흠모하여 1869년 매천 황현이 15세에 그를 찾기도 했고, 면암 최익현은 1875년 제주도 귀양에서 풀린 후에, 1879년 흑산도 귀양에서 풀렸을 때 그를 찾았다.

학문의 정도를 가기 위해 정진했던 노사 기정진과 그의 학문을 흠모하고 뒤를 따랐던 매천 황현, 면암 최익현. 서로의 위하는 애틋함과 기상이 그들이 주고받은 여러 시에 담겨있다.

 도학이 남쪽고을에 있어 성망이 무거운데
 공자처럼 사모한 사람 누구이던가
 두 번째 찾아왔으나 도 못 듣고 얼굴만 뵈네
 쉰 살 되도록 배움 없는 후생이 부끄럽네
                        - 면암이 병중의 노사를 만나 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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