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자락에 깃든 선조들의 혼과 기개
무등산 자락에 깃든 선조들의 혼과 기개
  • 시민의소리
  • 승인 2008.03.11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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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문학과 정치, 사회와 역사 유기체로 인식한 조선 선비들

순서
1. 민족정신이 흘러넘치는 보성의 2번국도(上·下)
2. 황룡강에 흩뿌려진 선비정신
3. 화순 땅에 펼쳐진 충과 효
4. 문예와 정치와 충절이 평등한 무등산
5. 담양. 학문의 끝은 어디인가?
6. 곡성, 골골마다 스며있는 애국과 충절
7. 여수, 진남관에서 충무공을 사색하다
8. 혁명의 고향, 해방광주

기행경로
① 충장사         -       광주 북구 충효동
② 풍암정      -                          충효동
③ 분청사기전시관        -      풍암정길
④ 개선사지석등   -  담양 남면 학선리
⑤ 충효동정려비각 - 광주 북구 충효동
⑥ 환벽당                -                충효동
⑦ 식영정         -       담양 남면 지곡리
⑧ 서하당                 -                지곡리
⑨ 가사문학관         -                지곡리
⑩ 박동실비             -               지곡리
⑪ 소쇄원                -                지곡리
⑫ 독수정원림         -        남면 연천리
⑬ 물염정           -  화순 이서면 창랑리

우수가 지나고 며칠 후면 경칩이다. 날씨는 완연한데 마음 속은 아직도 겨울이다. 지난 해 말 1년 내릴 눈이 한꺼번에 쏟아지더니, 유난히도 이번 겨울은 길게만 느껴진다.

이른 아침, 찬바람이 날카롭다. 산수5거리에서 출발해 전망대, 충장사, 풍암정, 광주댐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숫한 사연이 깃든 곳이다. 광주와 화순 담양 곡성까지 아우르는 넓고 듬직한 무등산,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연과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고문 끝에 옥사한 김덕령

   
 
  ▲ 김덕령 장군과 무등산의 인연은 유독 깊었다.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와 관련된 전설이 무등산 곳곳에서 전해진다. 김덕령 장군의 묘.  
 
포장길을 따라 이리 돌고 저리 돌며 도착한 곳은 충장사이다. 무등산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김덕령장군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고도 마지막엔 감옥에서 옥사당한 김덕령. 500년이 지난 지금도 그에 대한 설화와 민담이 전해져 내려온다. 당대 호남의 큰 산이요 맥이었던 김덕령에 대한 아쉬움과 한탄이 큰 까닭이다. 그의 신출귀몰함과 용맹함을 설명해주는 말바우시장 설화가 있다.

김덕령이 무등산에서 활시위를 당기고, 자신의 준마를 타고 지금의 말바우시장에 도착했다. 도착해서 화살을 찾아보니 화살이 없었다. 김덕령은 자신의 말이 화살보다 느리다고 생각하여 칼로 말의 목을 쳐 죽이자, 그때서야 그 말 앞으로 화살이 떨어지더란 얘기이다. 그래서 생긴 지명이 말바우라는 이름이다.

김덕령은 옳고 그름에 냉철했던 사람이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성품은 때론 시기와 질투의 표적이 되곤 했다. 건방진 도체찰사의 노속을 매로 때려죽인 것이나, 무고죄로 압송되어 옥사한 것을 보면 불의를 참지 못하고, 부러질지언정 휘지는 않겠다는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억울한 죽음은 두고두고 역사와 세기를 넘어서까지 민담과 설화로 전해지고 있다.

산자의 슬픔, 풍암정과 김덕보

▲ 큰 형과 작은 형을 아픔으로 떠나보낸 동생 김덕보는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이곳에 풍암정을 짓고 두문불출한다.
충장사를 지나 마을에 이르면 풍암정 이정표가 보인다. 원효계곡 상류방향으로 차를 몰아 막다른 지점에서 차를 세우고 풍암정을 향해 걷는다. 계곡을 막아놓은 저수지 물은 잔잔하고 아침의 칼바람도 잦아들었다. 줄을 선 나무들은 물이 올라 머지않아 새싹을 터트릴 기세이다.

풍암정은 숫한 문인들이 기거하며 집필했던 곳이다. 빼어난 자연환경을 벗 삼아 세상과 시를 논하던 풍암정. 이곳을 지은 이는 김덕령의 동생 김덕보(1571~1596)이다. 그의 장형 덕홍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과 연합한다.

전주 근처 금산에 이르러 왜적을 만나 덕홍은 고경명과 함께 그곳에서 순절한다. 장형의 뒤를 따라 작은형 덕령이 의병을 일으키고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그러나 억울한 누명으로 덕령마저 옥사하자 덕보는 슬픔에 겨워, 이곳에 풍암정을 짓고 두문불출 칩거생활을 시작한다. 큰형은 왜군에게 죽고 작은형은 나라에 죽고, 살아남은 풍암을 위로하고 품어주는 곳은 오직 한곳, 여기 무등산 원효계곡이 유일했다.

무등산은 격동의 역사에서 상처받고 피폐해진 영혼까지 안아주는 넓은 산이다. 풍암정 주변으로 무운장수를 비는 촛불이 군데군데 불을 밝히고 있다.

충효동정려비각과 당산나무

발길을 돌려 다시 길을 잡았다. 사적 141호로 지정된 분청사기전시관에 들러 조선전기의 도자문화를 살폈다.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자 보물 111호로 지정된 개선사지석등의 섬세함과 웅장함에 감탄하고 충효동정려비각에 도착할 때는 어느덧 배가 출출해 졌다.

금강산도 식후경. 머지않아 여당이 될 당에서도 밥그릇싸움이 한창이다. 그냥 점심먹자하면 될 터인데 일행 중 누군가가 밥그릇 싸움 타령이다. 그저 웃지만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것을 어찌하랴. 무심코 들어간 식당에서 입에 딱 맞는 백반과 두부김치로 허기진 배를 달랬다.

생태공원이 조성된 이곳 충효동일대는 정려비각을 중심으로 서 있는 당산나무가 일품이다. 어른 서넛이 양팔을 벌려야 할 정도의 큼직한 기둥에 제 마음껏 뻗어나간 가지들이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충효동정려비각(忠孝洞旌閭碑閣)은 1789년(정조13년)에 임금께서 김덕령 일가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과 비각이다. 김덕령의 부인 이씨는 정유재란 때 추월산에서 왜군의 추격을 받고 순절하였다. 이곳의 마을 이름도 임금께서 하사한 것으로 비각 안에 忠孝之里라 씌어있다.

정철의 성산별곡

다시 길을 잡으면 전국 최고의 가사문화권과 만나는 길이다. 담양 고서에서 진입하여 광주댐을 따라 올수도 있으나, 광주에서 진입하여 고즈넉한 무등산을 끼고 돌며 산세에 취하고, 충절의 김덕령을 만난 뒤 찾아가는 가사문화권이 여행의 맛을 더하기에, 외지의 친구들에게 주로 소개하는 코스이다.

이제 대화의 중심은 문학과 정치로 옮겨졌다.

레닌은 나사못과 톱니바퀴를 예로 들어 정치와 예술의 관계를 해석했다. 기능적이고 도식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술과 정치가 서로 분리되지 않고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일컫는 말이다. 지난 호에, 필자와 가족 그리고 민족관과 관련한 유기적 연관성을 이야기 했듯 문학과 정치, 사회와 역사 모두 고유 영역이 다를 뿐, 서로 작용하고 관계하는 유기체이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이러한 유기적 관계를 잘 알고 있었고, 유명한 학자들이 詩, 書, 畵에 능한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환벽당은 나주목사를 지낸 김윤제(1501~1571)가 고향으로 돌아와 짓고 후학들을 양성하던 곳이다. 김덕령과 김덕보는 그의 종손이다. 김윤제의 제자로 정철과 김성원이 있다. 16세부터 27세까지 김인후, 기대승 등의 명현들에게 학문과 시를 배운 정철은 1562년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명종으로부터 사헌부지평을 제수받았으나 강직하고 청렴한 자세를 고집하여 말직에 머무르다 1567년에 지평이 되었다.

이어 곧 북관어사가 되었으며 1568년에는 이이와 같이 독서당(讀書堂)에 피선되고 수찬·좌랑·종사관·교리·호남어사 등을 지냈다. 동인과 서인의 분재에서 서인편에 가담하여 분쟁에 휘말려 사직하기도 하고, 강원도 관찰사가 되기도 하며, 1584년엔 대사헌을 제수받기도 한다. 강직하고 청렴하나 융통성이 적고 당돌한 행동에 주저함이 없는 그의 성품으로 수차례의 관직과 사직을 되풀이하던 정철은 유배생활까지 한다.

그가 지은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의 가사문학은 이러한 그의 성품과 정치성향의 이면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곳 환벽당은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호이다.

그림자도 쉬고 가는 식영정

▲ ‘식영정 사선(四仙)’으로 불린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 정철은 식영정 주변 절경 20곳을 정해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을 지었다.
식영정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이다. 지척의 거리에 전라남도와 광주시의 기념물 1호가 함께 있는 것이다. 이곳은 김성원의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이다. 김성원은 정철의 처외재당숙으로 정철보다 11년이나 연상이었으나 정철이 이곳 성산에 와 있을 때 환벽당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문이다.

사람들은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 정철을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렀다. 이들은 성산의 경치 좋은 20곳을 택하여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을 지었다. 훗날 성산별곡의 단초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식정정의 툇마루 위에 올라서면 주변의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주변의 소나무가 높이 자라 운치를 더해주는 모습이, 막걸리 한 사발 곁들이면 누구나 신선이요 절로 시인이 된 기분이다.

식영정 옆으로 김성원이 기거하던 서하당이 복원되어 있고 송강집을 보관하기 위한 장서각과 부용당 그리고 입구에 성산별곡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일반적인 서원의 형식을 모방한 건축인데,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가사문학관에는 박동실비가 있다. 담양군 금성면 대관리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애기명창’이라 불리던 그는, 박유전, 이날치, 김채만에 이어 서편제의 큰 산이요 맥이다.

가사문학관에 들러 이곳저곳 둘러보고 발길을 재촉했다. 소쇄원과 독수정원림, 물염정까지의 일정이 만만치 않다. 가사문학관에는 박동실비가 있다. 1950년 6.25전쟁이 시작될 무렵 월북하여 판소리 ‘오가전집’을 창작 정리한 인물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판소리의 형식에 현실의 내용을 적절히 혼합하여 시대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 특징이다. 요즘 방영되는 ‘퓨전 홍길동’처럼 변화된 시대와 구미에 맞게 개극하고 창작한 방식이다. 1961년 북한에서 ‘인민배우’의 칭호를 받았다.

가사문학이 역사적으로 평가를 받는 것은 한문이 주류인 시대에 국문으로 시를 창작하여 지금의 한국문학에 초석을 다졌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시인은 학자이자 정치가이자 화가였다. 철학은 형상사유와 개념사유의 유기적 결합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우리의 선조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을 사는 정치인, 학자, 작가들이 염두에 둘 대목이라 생각한다.

대숲과 맑은 물, 깨끗하고 시원한 소쇄원

양산보는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죽자 하향하여 별서정원에 은신한다. 별서정원이란 살림집과 떨어져 산수가 수려한 곳에 주거공간을 마련하고 정원을 조성한 곳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주거공간은 남녀유별의 유교적 가치에 따라 크게 안채와 사랑채로 나뉜다.

안채는 사적공간으로 안방마님이 기거하며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곳이다. 사랑채는 공적 공간으로 대감마님이 기거하며 집밖의 대소사 즉 학문과 정치, 그리고 귀한 손님과 조우하는 곳이다. 핵가족화가 진행되며 집안에 이러한 공적 공간이 없고, 남의 집을 방문하는 것이 예절에 어긋나는 지금과 비교하면 공동체적 삶이 어느 정도 후퇴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입구의 대숲을 지나면 계곡을 끼고 대봉대와 상하지, 물레방아와 애양단이 있다. 자연미를 온전히 보존한 채 지어진 모양새가 한 폭의 그림같다. 외부담 아래로 계곡물이 흘러들고, 오곡암을 굽이쳐 폭포로 떨어지는 물길이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무릉도원이요 선인의 세상이다. 제월당이 안채의 역할을 하고 광풍각이 사랑채의 역할을 한다. 광풍각에 앉아 사변의 풍경에 취하고, 계곡을 흐르는 물에 취하고, 모처럼 찾아온 벗에 취하며, 후일을 기약하는 사림세력이 머물던 현장이다.

不事二國, 獨守亭

고려말 이성계는 선죽교에서 정몽주(1337~1392)를 살해한다. 서은 전신민은 고려말 공민왕 때, 병부상서를 지낸 무장이다. 정몽주가 살해되고 고려가 멸망하자 전신민은 두 나라를 섬길 수는 없다고 다짐하며 이곳으로 은거했다. 대부분의 정자가 남쪽에 향을 두는데, 독수정의 향은 북향이다. 경상북도 성주군의 한개마을에는 마을의 안길과 반대쪽에 대문채를 둔 북비고택이 있다.

영조에 의해 사도세자가 참사당하자 호위무관이었던 이석문이 관직을 버리고 평생 사도세자의 넋을 기리고 세상을 등지고자 대문을 북쪽으로 낸 건물이다. 독수정의 향이 이처럼 북향인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전신민은 고려의 신하이지 조선의 신하는 아니라는 생각으로 이렇게 향을 북쪽으로 독수정을 짓고, 매일 고려의 수도, 송도를 향해 곡배를 하였다 한다.

현재의 건물은 1891년 후손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1915년, 1972년 중수하였다. 정자 주변의 대나무 숲과 소나무 숲이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김삿갓이 생을 마친 물염정과 적벽

▲ 방랑시인 김삿갓이 오랜 방랑을 끝내고 마지막 죽음자리로 택했다는 물염정. 방랑시인의 방랑기를 잠재울 만큼 물염정의 풍광은 여전히 매혹적이다.
독수정을 뒤로 하고 바쁜 마음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따사롭던 햇볕도 기운이 떨어지고, 서산이 조금씩 붉게 물든다. 물염정에 올라 일행들과 막걸리에 목을 축였다. 몇 해 전 건립한 김삿갓 시비가 있고 사변의 수려한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위는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있고, 바위 틈새로 모질게 자란 소나무와 단풍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수놓아져 있다.

방랑시인 김병연(김삿갓)이 오랜 방랑을 끝내고 생을 마치기에 부족함이 없는 풍경이다. 이곳은 화순과 곡성 담양의 3개 군이 면한 곳이다. 지나는 선비들의 쉼터요, 동학군과 항일의병들이 서로 연락하고 교통했던 물염정이다. 제철을 만난 빙어 생각에 물염정 아래 식당을 들러 술잔을 더했다. 긴 하루의 여정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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