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들이 역사 잇고 민족 지켜
민초들이 역사 잇고 민족 지켜
  • 시민의소리
  • 승인 2008.03.05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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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싸움에 더 많은 민초들 의병으로 합세

순서
1. 민족정신이 흘러넘치는 보성의 2번국도(上·下)
2. 황룡강에 흩뿌려진 선비정신
3. 화순 땅에 펼쳐진 충과 효
4. 문예와 정치와 충절이 평등한 무등산
5. 담양. 학문의 끝은 어디인가?
6. 곡성, 골골마다 스며있는 애국과 충절
7. 여수, 진남관에서 충무공을 사색하다
8. 혁명의 고향, 해방광주

기행경로
① 고사정       -      화순읍 삼천리
② 최경회장군사당 -    화순읍 다지리
③ 조광조유배지 -      화순 능주면 남정리
④ 해망서원     -      춘양면 대신리
⑤ 학포당       -      이양면 쌍봉리
⑥ 쌍산의 소    -      이양면 증리
⑦ 양회일비     -      이양면 쌍봉리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자신의 심신을 단련하고 집안을 잘 다스리며 나라를 평화롭게 만드는 것이 군자의 도리임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근현대 옳지 못한 위정자들이 이 말을 왜곡하여 교육된 것이 사실이다. 먼저 자신을 단련하고 가정을 다스리며 다음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요지이다. 단계적이며 기계적인 논리일 따름이다. 이러한 논리로 접근하면 나라의 화급한 일이 발생해도 수신하지 않고 제가하지 않는 사람은 역사의 주체로 나설 수가 없다. 가당치 않는 논리이다.

무릇 나 자신과 최소 공동체 가정, 그리고 나라와 세계는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고 넓은 의미로 하나이다. 자본과 개인의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설정하여 개인주의가  급속하게 진행된 시대에서 이런 고리타분한 세계관을 다시 꺼내야하는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민족의 흥망이 아찔한 순간마다 개인의 이익과 가정의 평안을 떨치고 일어선 민초들에 의해 역사는 이어지고 민족은 지켜졌다. 이 땅의 산과 들에는 초개처럼 목숨을 버린 민초들이 묻혀있고, 가정은 무참하게 쓰러지기도 했다. 이들이 역사의 주인이요 민족의 지표이다.

최경회, 복중에 발발한 임진왜란

   
 
  ▲ 상중의 최경회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청을 세웠던 고사정. 고사정 앞으로 그때 의병들이 먹었던 우물이 있다.  
 
 화순읍 소방서 뒤편엔 아담한 마을이 있고 마을 옆으로 오래된 정자가 넓은 들녘을 보고 세워져 있다. 이곳이 최경회 장군이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청을 세운 고사정이다. 고사정으로 가는 길은 남쪽으로 난 넓은 도로에서 마을의 안길을 통과해 비좁은 길로 들어서야 만날 수 있다. 아직도 그의 후손들이 고사정 뒤편 안채에서 기거하고 있다.
 
최경회 장군의 모친 평택임씨가 1590년(선조23년) 12월 17일 별세하자 담양부사를 사임하고 3년 상을 치르기 위해 이곳으로 귀향했다. 2년 후인 1592년(선조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왜적은 파죽지세로 조선강토를 유린한다. 이에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최경회는 그의 형 경운, 경진과 함께 의병청을 세우고 고을마다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은다.

최초 모아진 300명을 고경명 휘하로 보냈으나 고경명은 금산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 임진년 7월 말, 5천여 명으로 불어난 의병들은 금산, 무주를 함락한 왜병들이 북서진을 계속하자 장수로 향한다. 장수는 15년 전 그가 장수현감으로 있었던 곳이다.

전라감사 권율은 의병장 최경회에게 ‘무주의 왜병들이 북서진하는 것을 저지하라’는 명을 내리고 이에 최경회는 적성산성에 진을 친다. 임진년 8월, 조총으로 무장한 왜병들은 최경회의 지략에 빠져 화살과 무기를 소진하고 의병들의 공격에 금산성으로 도주하나 식량이 떨어져 마침내 성을 비우고 도망친다. 지금의 거창 우두령에 미리 매복하고 있던 최경회가 이끄는 의병들은 이들을 전멸시키고 적장이 들고 있던 은월도를 전리품으로 획득하여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이 전투가 무주대첩이다.

 의병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승리하는 전투소식은 인근의 더 많은 민초들에게 희망을 던져준다. 이 싸움으로 의병으로 자원해 나서는 민초들이 늘어나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진주성 최경회, 그리고 논개

그 해 10월, 김시민이 목사로 있던 진주성이 왜군 2만에 의해 포위되고, 최경회는 정병 5000명을 선발하여 진주성으로 향한다. 진주성에선 노인과 부녀자까지 남장을 하고 배수의 진을 치고 결전에 임한다. 성 밖에선 전라우의병장 최경회, 전라좌의병장 임계영 등이 적의 후방을 위협하고 남강 건너편에선 경상도 의병들이 왜병을 위협했다. 왜병들은 앞뒤의 공격을 받으며 5일 동안 싸우나 마침내 패주하게 된다. 이 싸움이 임진왜란의 3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이다.

1953년 6월 왜병들은 진주성의 원한을 풀기 위해 다시 진주성을 공격한다. 진주성 내 3천 500명대 왜병 9만 3천명의 싸움이었다. 무려 8일간의 밤낮 없는 전투 끝에 진주성은 최후를 맞이한다. 최경회는 최후까지 싸우고 촉석루에서 남강에 투신하여 전사한다. 또한 진주성 함락 이후 왜장과 함께 남강에 투신한 주논개는 최경회의 소실小室이었다. 고사정에서 동면방향으로 1km쯤 가다보면 왼쪽으로 최경회를 기리는 사당이 있다.

개혁정치의 꿈을 화순에서 접다

▲ 정암 조광조가 유배되고 사사되었던 적려유허비 내 사당. 그는 이곳 능주에서 조선의 마지막 하늘을 본다.
능주읍 소재지에는 조광조의 뜻을 기리는 ‘조광조적려유허비’가 있다. 왕도정치를 실현하고 국태민안을 꿈꾸며 개혁의 선봉에 선 조광조는 훈구세력의 모함으로 그 꿈을 접는다. 이것이 조선의 4대 사화 중 하나인 기묘사화이다. 이곳 능주로 유배 온 조광조는 사사賜死되고, 김정·기준·한충·김식 등은 귀양 가서 사형당하거나 자결한다. 이 기묘사화를 기점으로 왕도정치의 꿈을 포기한 사림세력들은 대부분 낙향하여 지방에 은둔하거나 후학을 양성하는데 정진하며 왕도정치의 꿈을 접게 된다.

능주의 유허비는 훗날 우암 송시열이 조광조의 뜻을 기리고자 글을 쓴 것이다. 조선 중기 역사에서 큰 산맥이었던 조광조가 마지막으로 세상을 보았던 곳 능주. 인적 없는 제각엔 개혁실패의 쓸쓸함이 감돌고 있었다.

무오·갑자사화, 아 폭정의 세월이여

▲ 연산군의 폭정으로 죽은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과 정여해를 추모하기 위한 서원이다.
춘양면 대신리에는 혜망서원이 있다. 무오사화, 갑자사화로 참형을 당한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과 정여해를 추모하기 위한 서원이다.

무오사화(1498년 연산4년)가 훈구세력이 사림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벌어진 권력다툼이라면 갑자사화(1504년 연산10년)는 왕이 신하를 제거하기 위해 벌어진 권력다툼이다. 임금과 신하의 권위가 땅에 처박히고 나라의 녹을 먹는 자가 당쟁과 파벌로 역사를 망쳐버린 대표적인 사화이다. 부관참시까지 하는 살벌한 권력의 쟁탈전. 우리의 역사는 이들과 피 흘리며 싸워온 사람들에 의해 발전하고 변화되었다.

은둔하며 忠을 가르친 학포당(學圃堂) 

▲ 기묘사화로 귀향한 양팽손은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한 뒤 은둔하나 조선의 선비정신을 이곳 학포당에서 후손들에게 가르친다.
홍문과 교리에까지 올라 경연에서 진강을 한 양팽손(1488-1545). 기묘사화로 인해 관직을 잃고 고향으로 내려온다. 18세부터 인연을 맺은 조광조가 능주로 유배되고, 양팽손은 그와 조우한다. 그의 나이 32세 때이다.

그해 12월 조광조가 사사되자 양팽손은 그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지낸다. 잠시나마 꿈꾸었던 왕도정치와 개혁의 꿈을 접은 양팽손은 학포당(1933년)을 짓는다. 마을은 산과 산이 겹겹이 에워싼 쌍봉리. 은둔생활의 시작이다. 그의 학문을 존경하며 찾아온 학도들을 돌려보내며, 그는 유배되고 금고된 기묘학사들을 보살핀다. 신잠, 김구, 최산두 등을 찾아 장흥, 남해, 동복을 오고 간다.

양팽손은 슬하에 6형제와 서자 둘을 두었는데, 둘째 응태와 셋째 응정이 문과에 합격한다. 둘째 응정은 예조참의에 이르나 명사신으로 다녀오던 중 죽고, 응정은 홍문관 부제학에 이르기까지 한다. 양응정은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는데 지난 호에 실린 양씨삼강문에서 말한 것처럼 소설보다 더 참담하게 왜적에 저항하다 가족의 대부분을 민족에게 바친다.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 주저 없이 자식을 역사의 전면으로 내보내는 어머니가 있기에 또한 그를 따르는 자식이 있는 것이다. 경내에는 늙고 오래 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꿈틀꿈틀 파란만장한 양팽손가의 역사를 가지마다 안고 있다.

민중봉기의 현장, 쌍산의소(雙山義所) 

학포당을 나와 쌍봉리를 감고 있는 산길을 오른다.
조선 전기 무오사화 갑자사화 중기의 기묘사화 그리고 조선후기 쌍산의소, 조선역사 500년을 통찰하는 역사의 장이 겹쳐있는 화순이다. 쌍산의소는 양팽손의 후손 양회일을 비롯하여 임노북, 임상영, 안찬재가, 1907년 이곳 쌍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담살이 안규홍과 함께 일제와 전투를 벌인 핵심 근거지이다.

이곳에서 무기를 제작하고 유황으로 화약을 만들었으며 방어시설인 의병성(義兵城)을 쌓아 의병들이 주둔하며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최근 사적지로 지정되었으나 일반인이 쉽게 진입할 수 있는 도로시설은 여의치 않는 편이다.

민중, 의거, 항쟁, 만세 ……

▲ 일제에 저항하여 의병을 일으킨 양회일과 쌍산의소 의병의 뜻을 기리고자 세워진 양회일비.
쌍봉리 마을 입구엔 구한말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양회일과 의병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의 뒤편 아래엔 민중이라는 글귀가 음각되어있다. 그 위로 의거, 항쟁, 만세라는 글귀도 새겨져있다. 유추하여 해석하니 민중들이 일어서 항쟁을 하면, 민족이 만세를 누린다는 의미이다.

비록 역사적 유물과 사적이 항쟁이나 사화의 중심에 선 사람을 중심으로 전해지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민중들의 피가 더해졌기에 역사가 만들어 진 것이다. 최경회 장군이 일으킨 임진왜란의 의병이 그렇고, 조광조에게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 성리학이 있었으며, 쌍산의소 중심에도 민중들이 자각한 의병이 있었다.

양회일비 뒤로 튼튼하게 뿌리를 내린 배롱나무가 인상 깊다. 우리의 삶도 저처럼 뿌리 깊은 나무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건강한 철학이 사라진 시대, 우리는 어디에 뿌리를 두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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