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또 하나의 그리운 고향
북녘, 또 하나의 그리운 고향
  • 시민의소리
  • 승인 2007.09.21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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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위상복(전남대교수· 철학과)

▲ 위상복(전남대 철학과교수)
남과 북, 헤어진 지 어언 반백 년이 훌쩍 넘어버렸다. 분단의 장벽이 드리운 차단과 그에 따른 고통은 무엇보다 큰 것이었다. 우리 근?현대사의 질곡을 분단시대를 떠나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2000년, 6?15선언이 발표되고, 잠시의 흥분을 뒤로 한 채 우리는 다시 망각의 세월을 보냈다. 우리에게 분단시대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차츰 우리의 의식에서 멀어져만 가는 분단시대, 그러나 또 다시 다음 달 초 남쪽과 북쪽의 정부가 만난다고 한다. 누구나처럼 나도 무언가 커다란 선물이라도 있을 것 같은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다. 

나의 의식 속에 분단체제란 개념이 확연하게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 지난 1970년대부터였다. 그리고 80년의 뜨거웠던 광주항쟁을 지나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어서는 하루가 다르게 급한 물살의 변화에 몸을 맡기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세계화와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파고는 높기만 하다. 그 어떤 변화에 있어서도 내 좁은 가슴 속엔 분단의 극복과 통일은 화두가 되어 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왤까?

7세기, 이 한반도는 삼국체제가 2국체제로 전환되면서 통일국가 고려가 들어선 것이 10세기였다. 그러니까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단일민족 체계가 확립된 것만도 천년을 넘는 역사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함께해 왔으며, 천혜의 풍부한 자원과 빼어난 자연경관을 향유하면서 크고 작은 역사의 굴곡을 따라 비교적 평화스럽게 정착해온 것이 우리네 삶이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고 알프스나 럭키 산맥도 없는 나라에 풍부한 자원이라든가 빼어난 경관이라고 하면 외국께나 돌아다녔다는 사람들에게는 비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포도주나 올리브유 한 잔 제대로 나지 않는 나라에 무슨 천혜의 자연이냐고 비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반문해 보자. 그 숱한 외국의 소설이나 고전들에 대해 제목 하나 제대로 달만한 능력도 아직 갖추지 못한 주제에 죄다 일본에서 수입하여 사용하고 있는 처지에서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자연이나 역사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지 않는가? 

수년 전 구라파 몇몇 나라를 다니면서 느꼈던 뼈저린 체험의 하나는 도대체 냉수를 마실 수 있는 나라가 없었다는 것이다. 전부 끓여서 마시거나 커피나 탄산수를 마셔야하는 나라였으니, 우리네 냉수가 무척 그리웠다. 우리는 물을 골짜기에서 나는 그대로 어디서나 마시고 살아 왔으며, 거기에 무슨 커피나 향료를 타지 않았었다. 음료수가 개발된 나라들이란 냉수를 그대로 마실 수 없는 풍토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나라들이었으며, 물을 자연대로 마실 수 없는 나라에 무슨 과일이며 채소가 풍성하게 자랄 수 있을 것인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부턴가 냉수마저 마실 없는 나라로 변질되고 말았으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음료수와 출처마저 불명한 그들 광고의 홍수 속에 떠밀려 다니며 흥청거리고 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우리의 20세기 역사가 바로 물이 망가져 가는 역사였으며, 오늘도 우리네 냉수는 물론 가까운 이곳 영산강마저 목욕도 할 수 없는 독극물로 변해가고 있다니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내가 분단을 의식하며 통일을 꿈꾸는 것은 나변에 있지 않다. 명절이면 고향이 그립듯이, 이 한반도의 절단난 물의 줄기를 회복하고 끊겨져버린 산맥을 이어주려는 소박한 자연과 그 본성에 대한 기대 때문이며, 거창한 역사나 민족의 회복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북녘을 조금이라도 그리워하는 것은 물을, 깨끗한 냉수를 마시며 속을 차리고 싶다는 인간에 대한, 그리고 그 자연과 삶에 대한 꿈 때문인 것이지 역사와 사회에 대한 어떤 필연의 의식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들어, 또 하나의 덫과 걸림돌이 다가왔다. 내겐 차츰 광주항쟁이 어느덧 자연에 대한 폭력으로 변질되고 있는 조짐으로 다가 온 것이다. 광주항쟁이란 과거의 사건이 이젠 피할 수 없을 만큼 상품성과 물신성의 폭력에 노출되고 있으며, 자연 파괴적인가 하면 자연의 결합과 통일을 깨부수는 몰역사적인 집단적 치매현상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5?18이란 이름의 광장이 그러하고 공원이 그러하며, 국립묘지가 저지르고 있는 자연에 대한 폭력은 이제 역사와 사회에 대한 또 다른 문화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변질되고 있다. 소쇄원이 그러하고 벌떼처럼 웅성거리는 온갖 축제와 운주사가 그러하며, 예술의 거리와 가사문학관이 그러하고, 내일의 문화전당이 반듯한 나무 한 그루 서 있지 못한 시청사처럼 그러할 것이다.

광주는 왜 이다지도 반문화적이며 자연 폭력적인 현상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고 있는 것일까? 분단의 아픔도 잊은 채, 유기적인 본성을 떠난 무기적 굴레 속에 갇힌 채 반자연적이고 반통일적인 빛의 도시 광주, 빛이 아니라 반문화적인 어둠의 도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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