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물러서면
모두가 물러서면
  • 곽규호 기자
  • 승인 2007.06.18 11: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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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의 눈]곽규호 편집장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어려서부터 천재적 시재로 꼽혔고, 훗날 10만양병설을 주창하면서 왜의 움직임에 대비할 것을 권했으며, 퇴계와 더불어 최고의 성리학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나이 스물 아홉에 벼슬에 오르기까지 아홉 차례 과거에서 장원을 차지한 천재. 그가 선조 때 직제학에 오르면서 임금에 대한 기대가 높았지만 임금의 성품을 알게 된 뒤 물러갈 뜻을 두었다. 주변에서는 이를 두고 “사람마다 다 물러가기를 구한다면 누가 이 나라를 위할 사람이 있겠는가” 하며 만류와 힐난을 보냈다.

이 때 율곡은 웃으며 “위로 삼공(영의정과 좌우정, 우의정 등 삼 정승)으로부터 아래론 참봉에 이르기까지 다 물러가기를 구하는 사람이라면 나라 형세는 스스로 올라갈 것이오”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당시의 벼슬아치들이 바르지 않은 권력에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선비의 마음을 가졌더라면 과연 조선이 7년 동안이나 왜의 총칼 아래 강산을 유린당했을까.

민주화 운동의 상징 김근태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탈당과 대선 불출마선언을 두고 일부에서는, 시쳇말로 씹는다. 지지율 1%의 후보 축에도 끼지 못하는 인물이 탈당하면서 거창한 기자회견을 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의 지지율이 범여권에서 선두권에 있었더라면 그가 불출마하겠느냐고까지 막말을 한다. 대통령도 “정치적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뚝심과 배짱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다”면서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보도됐다.

김근태는 경기고-서울대 상대를 나온, 미래가 보장된 KS맨이었지만 대학 때부터 그의 경력은 치열하고 처절한 민주화 투쟁으로 점철된다.

1971년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으로 수배를 당하기 시작했다. 1974년에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배당했고, 1985~1988년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사건으로 구속당했다. 1990년에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활동으로 2년간 감옥에 있었다. 박정희 시절부터 시작해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에 저항해 싸우다 감옥살이, 고문을 당하던 그의 투쟁인생은 1995년 사면 복권, 이듬해 국회의원에 당선되기까지 30년에 가까운 세월에 이른다. 물론 국회의원이 된 이후에도 정치개혁, 민생경제 등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최근의 한미FTA 반대, PSI 참여 반대,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에서 한 발 더 나아간 토지공개념적인 접근 등에서 보여주고 있다.

한마디로 여야를 막론하고 거론되고 있는 대권 후보 가운데 민주화 운동경력이나 경륜으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그가 대중적 인기를 못 얻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노무현 대통령과의 석연치 않은 갈등도 하나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대통령과 싸우려면 최고 권력을 넘어설 각오가 돼 있어야 했다는 이야기다.

욕심을 버리고 오히려 힘이 붙어

김근태가 지지율이 낮아서, 통합정국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 자신의 욕망을 접었을 거라 폄하한다면 그의 경력에 무지하거나, 지나치게 정치를 마키아벨리적인 감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라 할 만하다.

오히려 불출마선언을 한 뒤 이미 정계의 리더십을 되찾고 있다. 15일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정치계 오피니언리더들을 상대로 한 차기대통령 적합도 설문에서 손학규, 이명박에 이어 10.6%의 높은 지지율을 얻었다.

공개적으로 욕심을 버린 그가 범여권 주자들을 상대로 설득작업에 나서면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와 천정배 의원을 만나 동의를 확인했고, 중도개혁통합신당 측으로부터도 박수갈채를 받았다. 5·18 기념일을 기해 시도했다 좌절된 범여권 대선 주자 연석회의 성사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 개혁세력의 절대 과제는 대선 승리에 모아진다. 노 대통령이 ‘끔찍하다’고 한 결과를 좌시하는 것은 직무유기다. 율곡이 말했듯이, 물러가기를 구한다면 백성은 자연스럽게 흐름을 따를 것이다. 버리고 나니 풀리는 김근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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