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스카이와 女人들의 수난
위안스카이와 女人들의 수난
  • 시민의소리
  • 승인 2006.1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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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시평]정규철(국제투명성기구 광주전남본부 공동대표)
근자에 국제결혼이 성행하면서 외국인과 혼인한 한국인 2세들의 성공담이 심심찮게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얼마 전 미식축구선수로 최고의 스타덤에 오른 하인즈워드(Hines Word)가 내한하여 국민의 기대를 모았고 그의 출세는 같은 처지에 놓인 국내 아이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줬다.

하인즈워드의 열풍이 가라앉는가 싶었는데 한말 주차(駐箚)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를 지낸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조선인 첩이 낳은 자녀들의 근황이 우리의 시선을 끌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가뜩이나 신경을 자극한 탓인지 그들의 안부가 반갑기보다는 부끄러운 과거로 다가와 비상한 반응을 일으켰다.

원세개는 ‘청’말 중국 직예총독(直隸總督) 이홍장이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임명한 사람이다. ‘감국대신’이라는 직책으로 마치 식민지에 군림하듯 총독행세를 하면서 내정간섭은 물론 온갖 행패를 자행하였다. 세도가인 안동김씨 처녀를 첩으로 맞이한 사실도 그의 흉포한 만행 가운데 하나로 보고자 한다.

중국 측 사료에 의하면 안동김씨 말고도 몸종으로 부리던 두 女人을 첩실로 들여서 7남 8녀(자녀는 모두 32명)를 두었다. 그 중 김씨 소생 위안커원(克文)의 셋째 아들 위안자류(家?)가 세계적인 물리학자로 이름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성공이 흥밋거리는 될 수 있을지언정 우리의 자랑이 될 수는 없다. 이는 다만 욕된 역사의 산물일 뿐이다.

위안스카이의 여성편력은 보통사람의 삶을 능욕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 나라를 능멸한 야만적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마지막 황제를 꿈꿨던 자의 소행이기에 더욱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위의 세 여인(김,이,오씨부인)과 관련이 있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위안스카이는 1886년에 문을 연 조선왕실병원 제중원부속의학교에 재학 중이던 세 명의 소녀를 사간 일이 있었다. 제중원에 첫 입학한 소녀는 다섯 명이였는데, 이들은 황해, 평안감영에서 추천한 총명한 기녀(妓女)들이었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끌려간 뒤 회향에 몸부림쳤다고 한다. 이들 기녀 3인과 첩실이 동일한 사건인지는 알 수가 없다. 만약 같은 사건이 아니라면 이들의 후일담도 어딘가에 사장되어 있을 법하다.

한편 제중원은 1885년에 개설한 서양식 근대병원인데 선교사 알렌(H.N.Allen)이 주관하였다. 알렌은 미북장로교회 의료선교사로 중국에 파견되었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한국에 잠입, 주한미공사관부 무급의사로 신분을 감추고 암약해오다가 갑신년 김옥균 일당의 칼을 맞고 중태에 빠진 민영익을 치료한 것이 계기가 되어 왕실의 신임을 얻었다. 그 후 10여 년간 한국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주한미공사관서기관 임시대리공사 전권공사로 근대 초기 한국의 외교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어쨌든 한말 중국의 한반도 경략은 서구 열강을 능가할 만큼 잔혹하였다. 한미수교 이후 주미한국공사로 부임한 박정양이 미국대통령(Grover cleveland)에게 제정한 국서에 우리의 개국연호, ‘짐’ 등의 용어를 사용한 사실을 트집 잡아 박공사를 부임 10개월만에 강제 소환하였다. 박공사는 위안스카이가 두려워 1년 가까이 일본에 체류하는 수모를 당했다.

위안스카이는 한국의 사실상의 지배자(The Real ruler)였다. 그의 한국지배는 일본으로 하여금 강력한 군국주의 국가로의 발전을 촉진시켰고 이는 청일전쟁의 원인(遠因)이 되었다. 알렌은 청의 조선 지배를 막기 위해 反淸親日外交를 폈는데 결과적으로 일본의 한반도 침략에 심각한 정신적 영향을 줬다.

미-일간의 랑데부와 동북공정이 이전투구(泥田鬪狗)만을 일삼는 연말정국과 맞물려 씁쓸하기 그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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