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죽음은 민주주의의 횃불이 되었네
당신들의 죽음은 민주주의의 횃불이 되었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6.09.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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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과 인물로 보는 광주 현대사]
5월 항쟁 당시 시민 지도부의 투쟁노선을 평가한다면 의견은 분분할 것이다. 목숨을 건 사수투쟁과 총기회수를 통한 협상투쟁 중 어느 노선이 옳았는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그것을 따지는 것은 어쩌면 오월항쟁에 있어서 아킬레스 건 인지 모른다. 어떤 판단이던 모두 존중해야하겠지만 사수투쟁을 주도한 전사들의 정신은 장엄하고 비장하다.

들불야학, 5월 영웅들의 운명적 만남

▲ 왼쪽부터 윤상원, 김영철, 박관현 열사. 사수투쟁을 주도한 윤상원과 김영철, 그리고 5월 항쟁 기간동안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사자후와 같은 웅변으로 5월 14일부터 3일간의 평화시위를 주도했던 당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모두 광주공단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개설되었던 야학의 교사들이었다. 윤상원, 김영철, 박관현은 모두 들불야학의 교사로 참여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야학은 5월 항쟁으로 이듬해에 문을 닫게 되나 결과적으로 5월 항쟁에 준비된 역량으로 참여하게 된다. 윤상원은 1950년 8월 광산군 임곡에서 태어나 임곡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에서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대학시절 독서로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인식을 깨쳤다. 졸업 후 주택은행에 입사하여 서울에서 근무하였지만 1978년 6월에 전남대에서 일어난 민주교육지표 선언 시위 소식을 접하고 사직서를 제출하고 입사 6개월 만에 광주에 내려오고 만다. 학창시절 가슴에 묻었던 사회운동가의 길을 걷고자 작정한 것이다. 처음에는 광천공단의 중소제조업체에 노동자로 취업하였다가 후배 대학생들이 추진하던 들불야학의 교사로 참여하였다. 김영철은 1948년 순천에서 태어났지만 전란의 와중에 아버지를 여위고 어머니, 동생과 함께 목포와 광주의 모자원(고아원)을 전전하였다. 광주의 명문 서중과 일고를 다녔지만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라 대학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9급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여 고향 근처인 승주의 면사무소에서 1년 6개월 정도 근무를 했지만 당시 부정부패가 만연한 공직사회에 환멸을 느껴 퇴직하고 군대에 입대하고 만다. 군대를 제대한 후에는 일용노동자 등 사회밑바닥생활을 전전하다 신협 교육을 받으면서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체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광주YWCA에서 지역개발운동의 일환으로 추진하던 광천동 시민아파트 주민 자활운동의 실무자로 활동한다. 마침 광천동 천주교 교리실을 빌려 개설하고 있던 들불야학의 취지에 공감하여 교사로 참여하였다. 박관현은 1953년 영광군 불갑에서 태어나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광주로 유학,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전남대 법대에 진학한다. 사법고시에 합격하겠다는 일념으로 대학생활을 시작하였지만 1978년 겨울, 들불야학에서 추진하던 '광주공단노동자실태조사' 작업에 참여하면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야학을 폐쇄하려는 사찰당국의 탄압으로 야학운영이 어려워지자 윤상원의 제안으로 들불야학 교사로 참여하였다. '생즉사 사즉생'의 결단으로 5월 항쟁에 참여 검정 고무신에 물들인 군복을 입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고시공부에 몰두하다 야학에 참여한 박관현. 정의를 수호하는 훌륭한 법관이 되겠다는 그의 결심은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조사를 하면서 흔들리고 만다. 기본 생계도 꾸려가기 힘든 저임금 노동자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훌륭한 법관이 되는 것 보다 더 시급한 일이 산적해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10·26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 이후 노도처럼 밀려드는 '민주화의 봄'의 열기속에서 그는 전남대 총학생회장에 출마하여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다. 짙은 눈썹과 선이 굵은 입술, 넓은 이마와 사자후처럼 토해내는 열정적인 웅변은 강직하고 믿음직한 이미지의 청년 지도자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5월 14일부터 3일간 연속 도청앞에서 광주권 대학생 연합행사를 질서정연하면서도 일사불란하게 지휘해냄으로써 광주시민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하지만 그는 5월 17일 저녁 예비검속으로 수배가 되자 시외로 피신해 항쟁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거액의 현상금까지 걸린 채 수배가 된 그는 2년 후인 1982년 서울 변두리의 봉제공장 기숙사에서 검거 되었다. 그해 10월, 광주교도소에서 5·18진상규명과 재소자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단식투쟁을 주도하다가 타계하고 말았다. 장기간 단식으로 인한 심근경색증이었다. 5월 항쟁에 참여하지 못하고 도피하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던 그가 속죄하는 마음으로 참여한 단식투쟁의 결과였으리라. 사회운동가로 일생을 살겠다는 신념을 굳힌 윤상원은 낮에는 신협 직원으로 밤에는 들불야학 교사, 한편으로는 사회운동단체의 총무 까지 맡으면서 광주권 사회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감당하였다. 5월 항쟁이 발발하자 투석과 화염병으로 시위대의 선두에 섰으며 야학 교사·학생들과 함께 행동지침을 알리는 시민특보를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도청에서 수습위원회가 구성되자 참여하였으나 무기회수와 협상을 통해 해결하려는 방식에 반대하여 시민들의 무장을 확대하여 투쟁역량을 강화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5일 그는 김영철, 정상용, 이양현, 박남선 등과 함께 일부 수습위원들의 무기반납 주장을 와해시키고 수습위원회를 투쟁위원회로 개편하였다. 26일 오후 3시에는 도청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취재차 광주에 와 있던 외신기자들에게 항쟁에 대한 입장을 밝힘으로써 광주 상황을 해외로 타전하였다. 27일 새벽 1시 계엄군이 진압작전을 전개하자, 3시에는 시민군을 모아놓고 열변을 토하는 마지막 연설을 하였다. 새벽 4시, 계엄군을 경계하기 위해 배치되어 있던 민원실 2층 유리창 가에서 복부에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함께 있던 김영철이 윤상원을 부둥켜안고 이불을 깔아 안치하였다. 광주YWCA 신협 참사로 근무하면서 광천동 시민아파트 주민자활운동에 몰두하던 김영철은 어느덧 윤상원과는 깊은 교우를 나누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자신은 같은 처지인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겠다는 다소 추상적인 비전을 갖고 있는 것에 비하여 역사와 사회에 대해 해박한 인식과 함께 깊은 고민을 하는 윤상원이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그동안 외롭게 살아온 그는 그때 이미 마음속에서 윤상원과 형제이자 동지로 운명을 함께 하고자 작정하였는지 모른다. 그는 도청 수습위 기획위원을 맡았으며 명분 없는 총기반납은 반대하였다. 27일 새벽 도청에서 윤상원의 죽음을 목도하고 계엄군에 체포된 그는 고정간첩으로 몰아붙이는 수사에 저항하여 두 차례나 벽에 머리를 찧어 자살을 기도하였다. 수사당국은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뇌손상으로 정신지체 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1981년 석방되던 해부터 18년 동안이나 정신병원을 전전하다 1998년 8월 영면하였다. 결코 헛되지 않은 죽음 역사와 사회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과 강직한 의지의 사회운동가, 목숨을 건 사수투쟁으로 항쟁의 순결을 지켜 낸 5월 대장 윤상원. 배고프고 굶주린 사람들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민중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평생을 함께하고자 했던 빈민운동가 김영철. 사자후와 같은 우렁찬 목소리로 대중을 지휘하면서 민주주의의 새벽을 싣고 달렸던 기관차 박관현. 모두 '생즉사 사즉생, -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 것이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단순하면서도 평범한 진리를 몸으로 실천한 5월 항쟁의 영웅들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갔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던 이발사가 죽은 후에도 민초들로 대변되는 수많은 갈대들이 진실을 외쳐 정의가 승리했듯이 5월 항쟁 이후 민주화는 빠른 속도로 진전되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을 웅변하듯이 죽음으로서 마지막 진지를 고수하려했던 윤상원, 김영철, 박관현…, 그리고 수많은 전사들의 죽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 광천동 천주교회 내의 들불야학당. 윤상원, 김영철, 박관현 등은 모두 들불야학에서 교사로 참여했고 80년 5월을 전후해 총탄에, 병마에 쓰러졌다.
/전용호 시민의 소리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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