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규칙
잠재규칙
  • 곽규호 기자
  • 승인 2006.09.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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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의 눈]곽규호 취재부장
청나라 말 도광 19년(1839) 산서성 개휴현의 임씨 성을 가진 현령이 성 정부에 불법을 저지른 고급관리 무리를 고발했다.

"흠차대신이 산서 지역을 방문했을 때나, 그 얼마전 대학사와 상서(청나라의 벼슬 이름) 등이 방문했을 때 모두 태원 부(지방정부)에서 나서야 했다. 이들은 판공비 명목으로 산서 번사(지방 정부 내 재무담당)로부터 2만냥을 빌어 흠차대신을 접대하였다. 그리고는 사후에 아랫사람에게 이 비용을 나누어 분담시켰으니 위에서 한 번 방문할 때마다 항상 3, 4만냥을 거두었다."

당시 중국 강남에서 꽤 큰 집 한 채 값이 200냥. 4만냥이면 200채를 살 수 있는 집값이다. 지금의 쌀값과 비교하면 한국 돈으로 100억원이 훌쩍 넘는단다. 고급관료들이 지방에 와서 금전을 상납받고 행패를 부린 것이다.

이런 엄청난 상소문이 어떻게 처리됐을까.

사실 이 호소문의 뒤에는 뿌리깊은 관료사회의 부패가 있었다. 지역에서 발생한 부녀자 윤간 사건을 수사하러온 황제의 어사를 임현령은 관례에 따라 정성스럽게 모시고 용돈도 두둑히 넣어 줬건만 조사를 마친 어사는 보고서에 임현령이 사건을 숨겼다고 적었고, 중앙에선 그를 파직한다고 명령이 떨어졌다.

임현령의 상소문은 이에 대한 반격이었던 셈이다.

고발장에 이름이 들어간 고급 관리들은 오히려 임현령에게 고개를 숙이고 큰 돈으로 보상할 테니 스스로 잘못을 시인하고 상소를 철회할 것을 제안했다. 결국 임현령은 직위도 보장받고 돈까지 덤으로 얻게 되어 결말이 난다.

중국의 언론인 우쓰(吳思이)가 지은 '잠재규칙'이란 책은 역사에서 드러난 수많은 관료사회의 관행들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당시 중국에서는 임 현령이 보고한 상소문의 내용은 너무나 광범위하게 시행되는 규칙과도 같은 관행이었다.

숨겨진 규칙, 이를 당시엔 '누규(陋規)'라고 불렀다. 춘추전국시대부터 등장하는 이 용어는 '구차한 규칙'이란 뜻으로 떳떳하게 내놓고 요구하진 않지만 공직사회에서는 서로 잘 이해하고 당연히 여겨지던 행위준칙이었다. 이것이 중국에만 국한되어 사용되는 용어가 아님은 분명하다. 나라마다 용어는 다르지만 비슷한 뜻을 가진 낱말을 갖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지방 교육청 간부가 전근을 앞두고 자신의 임기 중 발주한 공사에 대한 리베이트를 받지 못해 발을 동동 굴린다. 참다못해 경리 담당 직원에게 지시해 공사업자에게 내일 전근이니 오늘 중으로 빨리 리베이트를 입금하라고 전화하도록 했다. 결국 그 업자가 입금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실소를 참을 수 없는 해프닝이려니 했더니, 업계에서는 흔한 일이라고 한다.

상하 관료간의 '누규'가 아니라 업자와 교육공무원 사이의 보이지 않는 규칙, '누규'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교장의 결재도 없이 기자재를 발주한 모 중학교 행정실장 이야기도 또다른 일면이다. 기자재 관련 리베이트만 2천만여원이었다면, 건물을 지을 때는 또 얼마를 상납했을지 모를 일이다.

광주시 교육청에서는 이를 언론에 공개한 교장과 행정실장에 대해 모두 중징계 처분을 내렸다. 교장은 직무수행능력 부족이 징계사유이고, 행정실장은 회계질서 문란이 그 이유였다.

직무수행능력의 어떤 부분이 문제였냐고 기자들이 물었지만 답변은 모호하다. 상급 책임자가 연루돼 있다는 제보도 무시됐다. 교육청은 "뒷돈 수수의혹과 연관이 없는 곁가지"라서 감사나 수사의뢰는 않겠다고 발표했다.

학교에서의 비리 제보나 학부모들의 불만에 대해선 그토록 느릿느릿하던 게 교육계의 관행이다. 그런 면에서 광주시교육청의 이번 징계조치는 일사천리, 쾌도난마로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만약 경찰이나 검찰의 수사가 일개 학교의 문제를 조사하는 데 그친다면 이는 우리 사회에 '잠재규칙'이 여전히 잘 지켜지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학교장과 행정실장간의 다툼에서 시작된 이번 교육기자재 납품 비리 의혹이 교육계의 '잠재 규칙(陋規)'을 공개하고 척결하는 첫 단추가 되지 않을까 자못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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