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목과 질시를 넘어
반목과 질시를 넘어
  • 시민의소리
  • 승인 2006.08.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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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시평]박몽구 시인·문학평론가
주한 미군 재배치를 둘러싼 평택의 대치 상황, 한국군의 작전권 환수 등을 둘러싼 충돌들은 우리 사회의 지표가 어디까지 왔는가를 되묻게 한다. 충돌 당사자들 사이의 대화가 불가능하게 비치는 상황은 자주 독립을 선포한지 60년 가까운 나라인지 의심하도록 만들고도 남는다.

식민지의 멍에를 벗어던진 것은 더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일제와 미국으로 이어지는 보이지 않는 끈이 우리의 판단중추를 안개를 뿌린 듯 흐려놓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옥타브 마노니에 따르면 식민 상황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관계는 열등감의 조작과 의존 콤플렉스로 이해된다. 오염된 자본과 지배 체제는 끝없이 식민지 국민들에게 열등감과 함께, 자신들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리라는 불안 국면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몇몇 원주민 엘리트들 골라 적당한 직위와 부를 주고 자신들을 대신해 채찍을 들게 함으로써, 피를 묻히지 않고도 질서를 유지한다. 그람시에 따르면 이처럼 작은 단위의 집단에서 질서를 도모하게 함으로써, 큰 단위의 집단이 벌이는 전횡과 비민주를 은폐하는 것을 헤게모니라고 한다.

프란츠 파농은 겉으로는 식민 통치에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이 같은 열등 콤플렉스가 깊이 내면화해 있을 때 신식민지적 현실로 진단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최근 불거진 군 작전권 환수를 둘러싼 시비도, 그 내면에 이 같은 열등 콤플렉스가 깊이 내재되어 있다. 미국이 아니면 안 된다는 단언의 배후에는 우리 스스로를 낮춰보는 비하감과 함께, 오염된 자본과 매판이라는 고리가 은폐되어 있다.

지난 7월 22일 '5·18구속부상자회' 총회에서 벌어진 충돌도 필자가 보기에는 위와 같은 맥락에서 파악된다. 어떻든 광주민중항쟁에서 작게는 광주, 대승적으로는 이 나라 민주주의를 온몸으로 지켜낸 이들은 운전기사, 농민, 빈자들이 중심이 된 기층 민중이었다. 그러나 이분들은 단 며칠간의 해방구 기간을 빼고는 차별과 열등감이 내면화된 현실을 오래토록 견디어 왔다. 변변한 직업도 없이 지내왔고 이제는 병도 점점 깊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전체 사회는 물론 광주 내부에서도 냉담해 왔다.

문제는 몇몇 지식인 출신들이 이들의 입지를 악용하여 자신들의 이권을 도모하고, 단체 장악을 시도했다는 데 있다. 필자가 판단하기로는 그것은 기층 민중들을 볼모로 한 헤게모니 게임으로서, 이익을 보는 자는 동지회가 아닌 보수반동 세력이다. 그러기에 지금 일각에서는 오일팔 유공자와 학생운동권, 정상배를 가리켜 3대 적이라는 막말도 오가지 않는가. 그렇지만 실상은 과연 그런가? 필자는 지식인들 아닌 저 거대한 기층 민중들이 탱크와 눈을 가린 총에 맞서서 이 나라 민주주의를 온몸으로 지켜내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이제 평시가 되어 그 아름다움이, 차별에 대한 울분과 소외에서 오는 열등감으로 은폐되어 있을 뿐이다.

탈식민의 길이 깊이 내면화된 열등 콤플렉스를 털어내는 일이듯, 모름지기 광주가 할 일은 온몸으로 광주를 지킨 그분들을 더 이해하고 함께 하는 일이다. 아울러 몇몇 식자층들 은 그분들을 내세워 눈앞의 이익을 도모하는 망동에서 손을 씻고, 건강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보태야 한다.

광주부터 탈식민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낼 때, 차별과 조작된 열등감을 밑천으로 벌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비이성적 편 가르기는 설자리을 잃을 것이다. 손가락질보다, 좀더 넓은 시야와 애정을 갖고 시대고를 앓는 이들을 건강한 비판과 대안 세력으로 끌어올리는 일, 그것은 바로 당신 몫이다.

/박몽구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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