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
이상과 현실
  • 정지아
  • 승인 2006.08.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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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시평]정지아 소설가
스스로를 참회보수라고 지칭하는 한 선배가 있다. 대학시절, 독재는 죽도록 싫으나 그에 맞서는 진보 또한 자신들만이 진리요 길이라고 주장하니 독재와 다를 바 없다며 호된 비판을 참지 않아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욕을 먹던 선배였다. 그런 선배가 얼마 전 술자리에서 북핵문제를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공개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세 가지 원칙에만 합의하면 된다는 것이다.

1. 북핵을 폐기한다.
1. 북핵폐기로 인해 외적의 침입이 있을 경우 남북이 공동대처한다.
1. 위의 조항을 UN이 인정하고 보호한다.

선배는 부력의 법칙을 발견한 저 그리스의 아르키메데스처럼 흥분하여 눈을 반짝였으나 좌중의 반응은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미국이 가만 있겠냐, 는 게 첫 반응이었고, 옆 사람은 일본도, 하고 덧붙였다. 또 다른 사람은 시큰둥하게 맥주를 홀짝이며 남북이 짝짝꿍이 되면 중국도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한 마디 거들었다.

좌중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선배는 자신의 견해가 순수한 낭만-그러니까 그닥 현실적이지 않은-에 근거한 것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UN이 인정하고 보호하는데 미국이 어쩌겠느냐는 것이었다.

선배의 열정을 보다 못한 누군가 북핵을 폐기했다고 하면 미국은 반드시 그것이 사실인지 사찰을 하겠다고 나설 것이며, 미국이라면 능히 없는 핵도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을뿐더러, UN이 국제평화를 위한 중립적 기구라는 것은 너만을 영원히 사랑한다는 바람둥이의 고백과 하등 다를 바 없다고, 어린아이 가르치듯 타일렀으나 선배는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세상이 선배의 말처럼 되어진다면 얼마나 행복하랴. 그러나 인류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이데올로기였던 사회주의는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라는 당연한 사실을 간과함으로써 막을 내린 지 오래다. 이상은 현실을 이길 수 없다는 게 20세기의 교훈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이 현실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직시하는 것일 텐데, 수많은 개인과 조직, 국가의 이익이 맞물린 세상이라는 것은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과 같다. 세상은 정의가 아닌 힘의 논리에 의해, 힘을 가진 자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인 모양이다.

이쯤 오면 나 같은 사람은 슬슬 머리가 아파온다. 이러면 안 되잖아, 하는 소박한 정의감이 불끈거리지만, 별로 마땅한 근거는 없다. 전 국민의 1%에만 부과되는 종부세를 놓고 야단법석을 떠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세상이 답답하기 짝이 없다가도 그 1%가 한국 경제를 좌우하고 있으며, 그들의 돈이 묶이면 한국 경제도 묶인다는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런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결국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그들의 주도하에 경제가 움직인다면, 그래서 당장의 침체를 탈출할 수 있다면, 그 다음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질 것인가?

동물은 비정상으로 태어난 새끼들을 모두 죽인다. 그런 몸으로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 또한 초기에는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은 점차 장애를 갖고 태어난 자식도 거두기 시작했다. 지금은 국가가 나서서 그들을 보호해야 하는 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바로 그것이 인간이라고 믿고 싶은 나도 앞서의 선배와 다르지 않은 이상주의자인 것일까?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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