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의 마지막 밤에 띄우는 편지
2006년 5월의 마지막 밤에 띄우는 편지
  • 이상걸
  • 승인 2006.06.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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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의눈]이상걸 시민의소리 이사
S형!
18년만에 이승에서 저승으로 편지를 씁니다. 당신을 마지막으로 보낸 88년 5월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의욕이 충만하던 시기였습니다. 1987년 6월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으로 쟁취한 민주주의가 만개하던 때이지요.

대학생들만의 민주화담론이 노동현장으로 학계로 종교계로 언론계로 급기야 민중의 바다로 들불처럼 번져가면서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외면 받던 민주화세력이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급기야 사회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한 시기였습니다. 그 때 당신은 늘 진지하면서도 해맑은 웃음을 잃지 않은채  우리를 독려하곤 했지요.

범 진보진영 총체적 위기

S형!
2006년 5월의 마지막 밤, 우리는 처참한 패배 앞에 전율하고 있습니다. 전국을 수구 보수 정당과 기존세력이 다시 휩쓸었습니다. 상대적으로 개혁 진보적인 후보는 대부분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지역에서 시민운동 환경운동으로 지역의 미래를 꿈꾸던 풀뿌리 정치인들마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범 진보진영의 총체적인 위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혹자는 이걸 부인하고 열린우리당의 패배라고만 하고 싶겠지만, 이는 민주노동당에게도 커다란 충격과 위기를 불러온 것이고, 선거에 출마하지는 않았더라도 시민사회운동세력도 이 처참한 결과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가치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혹자는 이를 단순히 선거에서의 참패만이 아니라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87년 체제의 해체라고까지 말하기도 합니다.

S형!
도대체 이런 낭패를 초래한 원인이 무엇일까요? 시쳇말로 부정한 남편은 용서받아도 무능한 남편은 용서받을 수 없는 건가요? 아마츄어 수준이라고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국민의 증오를 받아야 하는 걸까요? 이것은 무능함을 넘어 교만하기까지 하여 국민의 눈에 '싸가지' 없게 비춰졌기 때문입니다.

지엽적인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당'이라는 당명만 하더라도 "왜 꼭 저런 이름을 고집해야만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동일시를 강요'하는 태생적 교만이 느껴진다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들의 교만과 배신에 진절머리가 나서 이번엔 한나라당을 찍었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사태의 가장 큰 책임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있겠지만 이제 더 이상 그에게만 원망을 늘어놓기엔 상황이 너무 엄중합니다. 이미 개혁 진보진영 전체의 문제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노무현정권과 우리당, 민주당, 민주노동당 등의 정치집단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나 노동운동권, 그리고 대학, 교회 등에 있는 모든 민주화 운동권세력들이 인권과 민주주의의 형식적 절차적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기여했고 인정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중의 생활상의 질적 수준향상은 '사상최대의 사회적 양극화 현상'이 말하듯이 무능과 무정책을 노정했습니다. 경제 관료나 기업인들로부터 '운동만 해서 공부가 부족하다'느니 'output'만 있었지 'input'이 없었다는 비아냥을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다시 시작하라는 지상명령

S형!
오늘 지구가 무너져도 한그루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했던가요? 좌절하지 않는다면 한편으론 이 상황이 개혁 진보진영에 새로운 기운이 싹틀 수 있는 전환의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도 모르게 스며든 자만의 늪을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헌신과 사명감도 자기성찰이 결여되면 자만이 될 수 있습니다. 더이상 조중동과 수구보수 때문이라는 '남의 탓 타령'이 면죄부가 될 수 없습니다.

준엄한 심판의 의미를 본질적으로 자각하고 새로운 정치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면 다시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만 민주화운동의 순수와 열정을 사회적 가치로 인정하고 기대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5월의 마지막 밤은 다시 시작하라는 지상명령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밤이 이슥해질수록 당신이 더욱 푸르게 그리워집니다.
/이상걸 시민의소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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