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꽃
모란꽃
  • 시민의소리
  • 승인 2006.05.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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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가 밝아오니]정지창 영남대 독문과 교수

1980년 광주가 없었다면 우리는 분단의 한반도를 정확히 볼 수 있었을까. 보통의 국민들이 일제, 미국, 소련과 중국이라는 외세의 의도와 남한 지배세력인 군부독재의 모습을 확인하기가 쉬었을까. 그래서 광주에 빚을 졌다고 하는 지식인들이 있다.
이들은 서울과 경상도, 충청도 전국 곳곳에 멀리 있으면서 광주를 사랑한다. 이번 호부터 정지창(영남대 교수) 김승환(충북대 교수) 김용주(언론중재위원회 사무총장) 박지동(한국언론법학회 감사) 네분의 글을 싣는다. [편집자주]


광주 이외의 지역에서 젊은이들이 광주의 5월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 세대가 3.1운동을 이해하는 것 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1980년대 후반에 태어난 요즘 대학생들에게는 광주민중항쟁이 현재성을 상실한, 까마득한 과거의 한 사건으로 기억될 뿐이다.

그래서 해마다 5월이 되면 나는 수업시간에 박효선의 [모란꽃]을 비디오 테이프로 틀어준다. 이미 10년이 넘은 테이프라 화질이 떨어지고 녹음 상태도 엉망이지만, 그래도 학생들은 긴장하며 광주의 진실에 접근한다. 추상적인 연대와 사건과 수치가 구체적인 현실로 재생되면서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한숨을 쉬거나 탄성을 지르기도 한다.

박효선을 기억하며

비디오가 끝나면 나는 이 연극의 작가이자 연출가인 박효선을 소개한다. 이 연극에 직접 출연한 그의 얼굴은 늘 진지하고 착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는 뜨거운 열정과 여린 감성으로 남보다 예민하게 시대의 고통을 느꼈기에 일찍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고 나는 담담하게 설명한다. 이른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나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이 박효선을 일생 동안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데 헌신하도록 채찍질하였고 그래서 그는 영원한 '5월 광대'가 되었다고. 

그러면서 나는 한탄한다. 어째서 착하고 양심적인 피해자들은 자의식과 수치심과 분노로 고통을 당하다가 병에 걸려 일찍 죽고, 태생적으로 자의식이 없는 가해자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지도 않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채 떵떵거리며 건강하게 장수를 누리는가. 물론 가해자들도 남모르는 고통에 시달리며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는 법이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내 눈에는 고통받는 억울한 피해자들만 보이니 어찌된 일인가.

올해도 나는 학생들과 「모란꽃」을 감상하였다. 그리고 80년 5월의 광주와 박효선에 대해, 그리고 연극의 주인공인 이현옥과 이 연극의 심리학적 연구자료를 제공한 오수성 교수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학생들은 열심히 들어주지만 해마다 수강생 수는 줄어들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인기 과목이었던 내 교양과목은 이제 철지난 유행 상품처럼 외면당하고 있다.

부끄러움도 모른 채 떵떵거리나

이러다간 폐강이 될지도 모르니 학점을 후하게 주든가,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 대신 가볍고 재미있는 주제로 바꾸든가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쉽지가 않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막상 학기초 첫 시간에 들어가서는 “여러분, 학점 관리를 위해 듣기 편한 과목으로 몰리는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한 과목 쯤은 학점이나 재미와는 상관 없이, 논술형으로 60분 동안 자기 생각을 적어내야 하는, 빡빡한 과목을 듣는 것도 의미 있는 일 아닙니까?”하고 오기를 부린다. 물론 그러고 나면 수강 정정 기간 동안에 학생 수는 푹 줄어든다.
  
이번 5·18 민주항쟁 기념 행사의 일부로 광주에서「금희의 오월」과 「일어서는 사람들」이 공연되었다고 한다. 지난 1988년 광주 YMCA 강당에서 공연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이번 공연은 못보았지만 공연 실황을 촬영한 비디오 테이프나 CD가 있다면 구해서 수업시간에 활용해야겠다. ‘광주’라는 주제는 바꿀 수 없지만 화질이나 콘텐츠는 좀 나아지지 않겠는가. 

/정지창 영남대 독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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