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화된 광주에서 탈출하려면
박제화된 광주에서 탈출하려면
  • 시민의소리
  • 승인 2006.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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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시평]박몽구 시인·문학평론가
2년 전 이맘때쯤 본 영화 [블러디 선데이]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 영화는 1972년 북아일랜드 데리시에서 벌어진 영국군에 의해 자행된 북아일랜드 구교도들에 대한 무차별 총격 사건이 그 배경이다. 수백년 동안 묵살되어 온 구교도들의 시민권 보장 요구가 있는 날 당국은 시민들의 의견을 차분히 듣는 대신 공수부대원들의 무차별 총격으로 답한다. 비무장으로 평화 시위에 나선 데리 시민들 앞에 공부 부대원들이 마치 이리 사냥이라도 하듯 풀어진다.

하지만 의식이 살아 있는 젋은 병사들은 지위 장교에게 "표적이 어디 있느냐?"고 몇 번이고 다그쳐 묻는다. 장교는 좀처럼 지적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저 거리를 가득 메운 시위대 모두가 표적이라고 외친다. 투입 전 불온한 세력이 도시를 파괴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교육했던 그는 무기 하나 들지 않은 시민들을 이른바 폭도로 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이 5·18광주민중항쟁의 전말과 너무나 흡사하다. 검사가 나서서 몇몇 정치군인들을 양민 학살 혐의로 기소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고, 영국 여왕이 비무장의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한 장교들에게 훈장을 수여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 가지 중대한 차이가 있다. 이 영화는 역사 기록과 사진 등으로 철저한 고증을 통해 다큐멘터리 성격으로 만들어졌으며, 하루 동안 벌어진 사건을 시위하는 사람들과 공수부대원들을 교차 편집해 화면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현실감을 높이기 위해 출연자들도 주인공 제리 도히너를 연기한 디클란더디는 첫 사망자였던 재키더디의 조카이며, 공수부대원들은 전직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는 데리 주민들과 유가족이 맡아 역사적 사건의 재연에 충실하였다는 것이다. 즉, 결코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서도 지식인을 중심으로 비이성적인 권력의 비인간적 횡포를 규명하려는 노력이 지속되어 왔으며, 여기에 전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가 도도한 흐름을 이루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장장 열흘간에 걸쳐 전개된 대하 드라머인 5·18에 비해, 불과 하루 동안에 벌어진 데리시의 피의 일요일은 지극히 차분하고도 이성적인 접근으로 진실을 규명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영화 [블러디 선데이]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함께 2002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그랑프리인 황금곰상을 차지했다는 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것은 북아일랜드 인권운동이 소수의 관심사를 넘어 세계적인 주목을 이끌어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피의 일요일 이후에도 진실 규명과 정의의 수호를 향한 관심이 도시 전체뿐만 아니라 북아일랜드 전역에 지속적으로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극히 중요한 내면적 고백을 해야 한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 없다. 오늘날 5·18광주민중항쟁에 대한 관심과 참여의 영역이 급속하게 축소되어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지식인들의 자아 성찰과 행동에 대한 신뢰가 크게 떨어진 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말해서 5·18 발발에서 미완의 혁명으로 저물기까지 명망있는 시인·작가들 대부분은 숨기에 바빴고, 내로라하는 교수들은 항쟁 말미에 겨우 백기를 보기 좋게 들자는 수습위원회에 얼굴을 내밀었다가 자수하기에 바빴다. 항쟁의 추이도 지켜보지 않고 외국으로 밀항해 버린 운동권 지도자도 있었다. 나아가 광주 출신 지식인들은 항쟁이 미완으로 저문 뒤, 기층 민중세력들의 끊임없는 희생으로 광주를 둘러싼 진실이 빙산의 일각만큼 벗겨지기 시작하자, 그런 움직임에 힘을 더하기보다 현실 정치권에 줄을 대기에 바빴고 오늘날에도 이른바 '광주'를 담보로 연명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런 사정하에서, 5·18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보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냉담한 사회적 분위기는 오늘날 뜻있는 이들이 지향해야 할 바를 잘 말해 준다. 또한 국가에서 훈장 박탈 결정을 내렸음에도 콧방귀도 뀌지 않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정치군인 출신들의 행위가 암시하는 건 무엇을 말해 주는가. 필자가 보기에는 이 일련의 모든 상황은 광주민중항쟁은 기념식이라는 박제가 아닌, 살아 있는 현재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광주를 삶의 근거지로 삼고 있는 지식인들이라면 모름지기 초심으로 돌아가, 자기 비판과 함께 먼저 살신성인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또한 자신을 그 자리에 있게 한 무직자, 목숨을 내건 택시 운전자, 피흘리며 죽어가는 이웃을 차마 모른 체할 수 없어 서슴없이 시민군이 된 평범한 시민들이 제자리에 설 수 있도록 남은 삶을 복무해야 마땅하다. 그런 솔선수범이 없는 한 광주민중항쟁의 진실 규명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을 것이며, 5·18은 더욱 박제화되고 외면당할 것이다. 필자 자신을 포함한 지식인들의 반성과 솔선하는 비움이 선행될 때 바로소 민심을 얻고 광주는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블러디 선데이]는 단순한 영화를 넘어 그 해답을 암시하고 있다.

/박몽구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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