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夢遊)
몽유(夢遊)
  • 배종민
  • 승인 2006.04.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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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종민의 미술기행]
삼월 하순인데도 아침저녁 바람 끝이 제법 쌀쌀하다. 길을 나서면 몸을 웅그리게 된다. 그런데 벌써 거리에는 매화와 산수유 꽃이 아름답다. 그 고운 자태를 보면서 생각해본다. 왜 저 꽃들은 완연한 봄바람이 아닌 찬바람 속에서 필까?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저 꽃으로 말미암아 찬바람에도 우린 봄을 예감하고 있음을. 어깨는 웅그려도 가슴엔 여유가 감돌 수 있음을. 불어라 봄바람아.

한편, 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다. 바로 춘곤증이다. 점심을 먹은 후 따사로운 햇볕이 등허리에 내리쬐면 절로 눈이 감기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봄에는 꿈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데,[장자(莊子)][제물편(齊物篇)]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이 특히 유명하다.

▲ 안견 [몽유도원도] 비단에 담채, 38.7×106.1cm, 1447년, 일본 천리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인 장자(B.C.369-290)가 어느 날 꿈을 꾸었다. 나비가 되어 꽃과 꽃 사이를 훨훨 날아다니는 행복한 꿈이었다. 잠에서 깬 그는 꿈속의 나비가 자신인지, 나비가 꿈속에서 장자가 된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이후 장자의 나비 꿈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일컫는 대명사처럼 회자되고 있다. 조선 세종 29년(1447) 4월 20일, 안평대군도 기묘한 꿈을 꾸었다. 홀연히 어느 산 아래에 이르렀는데, 봉우리가 우뚝 솟고 골짜기가 깊어 산세가 험준하고 그윽하였다. 복숭아꽃이 만발한 사이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절벽은 깎아지른 듯 하고, 수풀은 무성했으며, 시냇물은 굽이쳐 흘렀다. 험준한 골짜기와 동굴을 지나니, 갑자기 동천이 탁 트인 곳이 나왔다. 사방은 산으로 에워싸이고,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고, 봄 햇살과 연기가 신비함을 더해주었다. 어느 틈엔가 안평의 곁에는 박팽년, 신숙주, 최항 등이 뒤따르고 있었다. 도원몽유(夢遊桃源)에서 깬 안평대군은 자신의 꿈이 예사롭지 않았다. 곧 안견을 불러 꿈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안견은 당대제일의 직업화가로서, 그의 작품은 천지의 조화가 가슴에 무르녹아서 그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안견은 마치 안평대군과 함께 답사를 하듯 화면을 그려나갔다. 낮은 야산에서 험준한 암산으로, 맑고 담백한 색채에서 화려한 채색으로, 잔잔함과 역동적인 필치의 완벽한 하모니, 부감법을 사용한 환상적인 공간의 창출까지 안견의 붓질은 거침이 없었다. 마침내 사흘 만에 그림이 완성되었다. 불세출의 명작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작품이 완성되자, 안평대군은 손수「몽유도원기(夢遊桃源記)」를 짓고, 21명의 문인들로부터 제찬(題讚)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하여 박팽년을 필두로 고득종, 강석덕, 정인지, 박연, 김종서, 이적, 하연, 송처관, 김수온, 이현로, 김담, 신숙주, 윤자운, 이예, 서거정, 성삼문, 최항, 최온, 만우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세종이전부터 출사한 고위원로관료부터 집현전 출신의 젊은 관료까지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이었다. 제찬자들은 안평의 몽유도원을 도연명의「도화원기」에 등장하는 무릉도원(武陵桃源)으로 이해하였다. ▲ 무계정사지, 서울시유형문화재 제22호(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319-4) ⓒ배종민
무릉도원은 중국 진나라의 학정을 피해 사람들이 신선처럼 살았다는 이상향으로서, 귀거래의 표상이었다. 따라서 신라의 최치원과 고려의 이인로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무릉도원을 찾아 헤맸지만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은 무릉도원이 정신이 우주천지간에 노니는[유(遊)] 경우가 아니라면 도달할 수 없고, 범인(凡人)은 꿈도 꿀 수 없는 신선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러하여 문인들은 안평대군에 대하여, 형체에 의지하지 않고 정신으로써 신선의 경지를 드나들고, 욕심 없는 마른나무처럼 깨어서 물가를 훨훨 나는 꿈을 지닌 존재라고 칭송하였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안평대군이 세종의 후사를 잇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었다. 이것은 당시 세종과 세자(문종)의 건강악화로 인해 정국이 불투명한데 기인했다. 박연에게 안평은 현실의 중심을 지키는 큰 저울로서 이상적인 군주상으로 생각되었고, 최항은 새로운 정치질서에 대한 완벽한 자질을 갖춘 대안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반면에 신숙주와 고득종 등은 몽유도원을 잠시 세상의 어지러움을 씻는 휴식처일 뿐이라고 여겼으며, 정인지와 윤자운 등은 명확한 입장표명을 유보하였다. 그것은 안평대군의 형인 수양대군을 의식한 때문이었다.

세종 32년(1450) 정월, 세종이 효령대군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건강이 급작스레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국왕은 세자와 수양대군을 불러 유언을 남겼다. 형제끼리 반목하지 말고 우애를 지켜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그리고 문종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불과 3년만에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승하하였다. 우려했던 상황이 닥친 것이다. 바야흐로 유충한 세자(단종)를 둘러싸고 장성한 수양과 안평 사이에 정치적 각축이 본격화되었다.

   
▲ 문양전, 보물 제343호, 변 29cm, 두께 4cm
부왕의 유언이 있던 정월에, 안평은 삼년 전 몽유도원을 회상하였다. 그리고 문종 1년(1451)에 백악산 기슭에 무계정사를 건립하였으며, 문인들을 불러 모았다. 이러한 안평의 행위는 역모로 의심받았으며, 실제 그러했을 가능성이 짙다. 그러나 안평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형인 수양대군이 주도한 계유정란에 의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안평대군이 꿈꾸었던 몽유도원의 소망은 좌절되고 만 것이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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