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이지 않는 한국영화, 계속 옹호해야 하나
한국적이지 않는 한국영화, 계속 옹호해야 하나
  • 이정우
  • 승인 2006.03.25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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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영화읽기]
▲ 위부터 [데이지], [청춘만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스크린 쿼터 축소 문제가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23일, 김명곤 문화관광부 장관 내정자 인사청문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영화배우 출신인 김 내정자에게 스크린쿼터 축소 문제에 대한 입장을 집요하게 따져 물은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김 내정자의 답변이다. 평소 문화다양성에 관한 소신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그가 "스크린쿼터 축소는 정부가 신중하게 검토해 확정한 사안"이라며 "재론할 수 없는 일"이라고 답변한 것이다. 소신을 바꾼 셈이다. 소신을 바꾼 그를 탓할 생각은 없다. 문화관광부 장관은 영화만을 정책대상으로 삼는 자리가 아닌 탓이다. 장관자리가 탐나서 소신을 바꿨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김 내정자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스크린쿼터 축소라는 정부의 입장에 커다란 변화가 올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신을 바꾼 김명곤보다 우리를 더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최근 한국영화 내용의 매우 우려스러운 흐름이다. 우려스러운 한국영화의 흐름 3월 넷째 주에 상영되고 있는 영화를 나열해 보면 〈청춘만화〉〈방과 후 옥상〉〈여교수의 은밀한 매력〉〈데이지〉〈로망스〉 〈구세주〉등이다. 이들 영화는 미학적, 혹은 사회적 고민이 희박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영화의 완성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소재와 구조에서 새로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는 엿보이지만 '영화만의 천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특별하게 위에서 언급한 영화들만을 문제 삼자는 태도는 아니다. 이전 영화, 그리고 앞으로 상영예정인 작품들을 들여다봐도 사정은 크게 달리 보이지 않는다. 근래의 '한국' 영화에서 '한국'을 찾기 어려운 것이다. 영화는 제작자본이나 촬영장소에 따라 국적이 정해지지 않는다. 문화콘텐츠로서 영화는 그 내용에서 '국적'을 획득한다. 제작에 들어간 자본은 다국적이지만 〈와호장룡〉은 분명 ‘중국영화’로 인식되고 있다. 독일 출신 빔 벤더스가 만든 〈파리, 텍사스〉는 미국에 관한 이야기이고, 역시 그가 만든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은 쿠바의 음악가들을 담아내고 있다. 독일영화가 아닌 것이다. 다소 경직된 접근이라는 비판을 감내하고서라도, 한국영화는 한국적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모든 영화가 그럴 수는 없겠지만 지금처럼 ‘한국적’인 영화를 찾기 힘들 정도로 영화에서 한국성이 실종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주장이다. 과연 〈데이지〉를 한국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화장실 코미디 수준을 부끄럼 없이 묘사하고 있는 〈구세주〉를 위해 스크린쿼터 사수를 외쳐야만 하는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는 고백이다. 과연 〈데이지〉는 '한국' 영화인가 ▲ 위부터 브로크 백 마운틴, 브로큰 플라워, 크래쉬
새삼 이 같은 생각에 이르게 된 배경에는 요즈음의 미국영화들이 부럽기 때문이다. 〈돈 컴 노킹〉 〈브로큰 플라워〉 〈브로크백 마운틴〉〈크래쉬〉 등의 영화들은 모두 ‘미국’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 〈앙코르〉나 〈시리아나〉를 보탤 수 있고, 각도는 조금 다르지만 〈뮌헨〉도 마찬가지이다.

영화라는 상업적인 장르 범위 안에서 사회성 짙은 주제와 소재들을 다루고자 하는 노력들이 한국영화의 탈사회성과 대비된다. 이 때 영화의 이념적 시각이 어느 방향이냐는 문제는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와는 상관이 없다. 영화를 만드는 집단의 기본적인 태도와 관련해 한국영화의 사회성 실종을 할리우드와 대비해 점검해보고자 할 따름이다.

작금의 한국영화는 할리우드 보다 더 심각하게 흥행성만을 염두에 두는 것처럼 보인다. 스크린쿼터 사수를 외치는 영화인들은 '국민들의 이해부족' 을 한탄하지만, 실상은 한국영화의 이 같은 흥행편향성이 '이해부족'의 진짜 이유일 수도 있지 않을까. 스크린쿼터 축소를 놓고 관객들이 예전처럼 영화인들의 편을 들지 않는 이유가 관객의 몰지각 때문인지, 영화와 영화인들의 안이함 때문인지 냉철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터이다.

"스크린쿼터가 축소되면 '○○○' 같은 영화를 우리는 더 이상 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한국영화의 제작 경향이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그 영화 '○○○'을 찾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든다.

축구나 야구처럼 여태껏 한국영화는 관객과 평단의 절대적 지지를 받아 왔다. 물론 그 바탕에는 좋은 영화를 만들어낸 한국 영화집단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노력의 주인공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어설픈 상업집단의 '마케팅'만 눈부신 것 같다. 과연, 계속 지지해야만 할까?

※언급한 영화들 중 약 4편 정도는 관람하지 못했고, 시놉시스만 참조했음을 밝힌다.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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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궁물 2006-04-11 23:25:53
기사를 보면서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4편의 영화는 시놉시스만 보셨다구요.
문고판 전쟁과 평화를 보고 톨스토이 별거 아니구만,
하고 읊조리는 것과 별반 다를바 없는 수준의
내용인 것 같다고 하면 지나칠까요?

평소 이정우 기자님의 글을 재미있게 잘 읽고 있었는데
이번엔 솔직히 좀 별로, 라는 소감을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영화는 보고 이야기하셔야죠.

아참, 저도 이 기사 내용은 바빠서 꼼꼼하게 읽지 못하고
네 단락 정도는 스크롤을 그냥 내리면서 보았을 뿐입니다.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