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계남이 왕이네"
"명계남이 왕이네"
  • 이정우 기자
  • 승인 2006.03.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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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기자의 영화읽기]〈손님은 왕이다〉
변두리 이발관 주인인 30대 중반의 안창진(성지루). '깎새'라고 불리기를 온몸으로 거부하는 이 남자에게 이발은 그야말로 성스러운 의식이다. 뽕짝 대신 클래식을 틀어놓고, 바리깡 대신 고급 가위로 손님을 맞이하는 안창진에게 어느 날 특별한 손님, 김양길(명계남)이 찾아들면서 예기치 못했던 고통이 뒤따른다. “너의 추악한 비밀을 알고 있다”며 돈을 갈취하는 김양길은 급기야 안창진의 아내 전연옥(성현아)을 유혹하고, 사채까지 빌려 쓴 안창진은 프로해결사 이장길(이선균)에게 김양길의 약점을 알아내러 뒷조사를 의뢰하면서, 네 인물은 의외의 파국을 맞게 된다.

탄탄한 전반부, 헐렁한 후반부

▲ 손님은 왕이다 《씨네21》 홈페이지에서 따온 시놉시스다. 여기까지가 영화 〈손님은 왕이다〉(감독 오기현)의 전반부이다. 후반부에서는 이 같은 관계망의 '이유'가 밝혀진다. 이 영화의 멋진 점은 무엇보다도 기가 막힌 '세공술'이다. 철저하게 조직된 화면이 빈틈없고, 그 안에서 움직이는 배우들의 연기가 숨이 막히도록 빼어나다. 흑백톤으로 구성된 화면은 성현아의 '색'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주기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피'를 훨씬 진하게 느끼게끔 한다. 급기야 무성영화시대의 기법까지 차용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영화에 대한 감독의 깊은 열정까지 엿보인다. 그러나 “〈올드보이〉보다 낫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도 드디어 이런 영화를 갖게 됐다” 등이 영화에 대한 전문가들의 찬사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기가 막힌 세공술은 전반부에서만 그럴 뿐, 정작 후반부는 헐렁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에서 그렇다. 첫째는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으로서 감독이 나레이션, 그러니까 주인공의 '말'을 도입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왜 갑자기 그토록 친절해져 버렸는지 아쉬울 따름이다. 뭉쳐진 긴장이 한 순간에 풀어지는 것 까지는 좋은데 카타르시스보다는 허무가 느껴진다. 주인공이 말로 다 설명해버리니 그렇다. 말과 화면의 산술적, 내용적 안배에서 심한 불균형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이유'의 내용이 휴머니즘이어서 맥이 빠진다. 휴머니즘에 찬성하냐, 반대하냐는 취향의 문제 때문이 아니다. 음모, 배신, 욕망이 뒤얽힌 것처럼 전반부의 이야기를 끌고 가더니 갑자기 '알고 보니 좋은 사람이었다'는 식으로 꼬리를 내려버리니 당황스럽다. 그러니까 '필름느와'의 온갖 감성을 다 동원해 놓고 나서는, 관객이 그 분위기에 막 빠져있을 무렵, 하나의 반전으로서 '인간극장'을 제시해버리니, 그것을 반전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감독의 뒷심이 부족한 탓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오로라공주〉와 〈손님은 왕이다〉 ▲ 손님은 왕이다
영화를 보면서 지난해 방은진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오로라공주〉를 떠올렸다. 중심사건으로서 살인이 있고, 후반부에 가서 그 논리적 맥락을 풀고 있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비슷한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 그이들의 첫 작품이라는 것도 공통점이다. 그런데 두 영화는 서로가 갖고 있지 못한 장점을 서로가 나눠 갖고 있는 묘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

미술, 요즘식의 어려운 말로 바꾸면 프로덕션디자인에서 〈오로라공주〉는 함량미달이고, 〈손님은 왕이다〉는 함량 넘침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배열에서 〈오로라공주〉는 일관된 탄탄함을 보여주었고, 〈손님은 왕이다〉는 전후반 균형잡기의 실패를 드러내고 있다.

한편 〈오로라공주〉는 피도 눈물도 없는 복수의 잔혹함을, 〈손님은 왕이다〉는 피와 눈물이 있는 복수(비슷한 어떤 것)의 휴머니즘을 제시하는데 무엇이 장점인지 판가름하는 일은 쉽지 않다. 다만 〈오로라공주〉의 설득력이 더 간절하다. 그것은 엄정화의 배역이 '엄마'여서가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오로라공주〉는 미술의 부재로 말미암아 필름느와의 거친화면을 획득했다. 많이 아쉽기는 하지만, 형식과 내용이 가까스로 서로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손님은 왕이다〉는, 후반부의 헐렁함(그야말로 상대적일 뿐인)이 두고두고 아쉽다. 전반부가 지나치게 탄탄해 후반부의 아쉬움을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손님은 왕이다〉는 오기현 감독에 의한, 명계남을 위한, 명계남의 영화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긴 설명은 삼가겠다. 다만 오 감독의 이 같은 태도는 매우 의미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 역시 명계남이라는 한 인간을 좋아하느냐, 아니냐, 는 취향의 문제와는 상관이 없다. 스릴러 장르의 영화에 한 배우의 다큐멘터리적 요소를 버물려 새로운 감성창출을 시도하는 감독의 시도는 찬양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손님은 왕이다〉는 분명 영화적 상상력의 영토를 넓힌 것이다. 감독의 다음 영화가 기대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감독이 경계해야할 '재능'은 '과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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