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과 영화
쌀과 영화
  • 이정우 기자
  • 승인 2006.0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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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의 눈]이정우 편집장
'스크린쿼터 사수 영화인대책위'와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농민단체가 17일 오후 서울 광화문 열린시민마당에서 '쌀과 영화' 촛불문화제를 열었다. 이들의 목표는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을 저지하는 것.

가무잡잡하고 투박한 농민들의 얼굴과 잘생기고 매끈한 영화배우들이 한 자리에 모여 FTA 반대 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조금 어색하다. 도대체 대한민국의 어떠한 '시스템'이 얼핏 이질적인 이들 두 집단으로 하여금 한목소리를 내게 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쌀은 우리나라 식량의 기본단위이다. 밥을 먹는다고 할 때 그 밥은 쌀로 지어진 것을 말하며 농사를 지은다고 할 때 그 농사는, 특별한 말을 붙이지 않는 한 쌀농사를 의미한다. 쌀을 내어주는 판국에 콩이네 팥이네를 붙들고 있을 리 만무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쌀협상은 우리네 농사 전부를 포괄하는 협상이나 다름없다.

자본이 곧 국가인 대~한민국

영화가 한국 문화의 기본단위는 아니다. 창의성과 다양성을 근간으로 삼고 있는 문화에 '기본'은 없는 법이다. 그러나 영화를 일컬어 '종합문화'라는 표현은 가능하다. 문화의 모든 양태들에서 자양분을 얻는 예술이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위기에 빠진다고 해서 곧바로 음악, 소설, 연극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지만, 산업적 파이가 가장 큰 영화의 흔들림은 어떤 식으로든지 문화판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영화가 시장의 예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실용적인 측면에서 영화는 한국문화의 '대표주자'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은 FTA 협상의 '전제조건'으로 스크린쿼터 축소를 내 걸었고, 이에 정부가 화답했다. 스크린쿼터 축소를 통해 한국정부가 얻은 게 고작 '협상'인 셈이다. 그리고 이 '협상'에서 쌀이 난도질당할 처지에 놓여있다. 간단히 말해 쌀과 영화를 제물로 삼아 반도체와 자동차를 팔아먹겠다는 속셈이 FTA이다.

대한민국 정부와 그 이데올로그들의 몸에 체화되어 있는 철저한 '자본' 중심적인 발상이 끔찍스럽다. 그들이 말하는 FTA의 불가피성은 '국익'이다. 농부와 영화인은 국민이 아니고, 두산그룹 총수일가나 삼성의 친척붙이들만 국민이라는 소리로 들린다. 정부가 말하는 국익이 그렇다. 국가가 곧 자본이고, 자본이 곧 국가라는 뜻이니 스스로 국가의 '계급성'을 공표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론적으로 국가는 '자본의 왕'이다. 자본주의 전체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개별자본의 미꾸라지 같은 짓을 제어하는 '총자본'이 국가라는 게 정치경제학의 설명이다. 이 때 개별자본은 삼성일 수도 있고, 이제 막 성장하는 벤처기업일 수도 있다. 개별자본 제어는 '내용'의 문제이지 크기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힘의 논리만 통하는 천민자본주의

그런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늘 크기를 기준으로, 자신에게 부여된 총자본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 큰 놈은 봐주고, 작은 놈은 때려잡는 식으로. 장르로 치면 산업자본, 금융자본에 친절하고, 농업자본, 문화자본에 악랄했다. 앞의 두 자본은 크고, 뒤의 두 자본은 상대적으로 작다. 장담컨대 정부는 협상에 논리적으로 임하고 있지 않다. 만약 농업자본, 영화자본의 영향력이 더 컸다면, '반도체와 자동차' 문화제가 열렸을지도 모른다.

농사, 혹은 영화를 포기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얻어지는 무언가는 없다. 그저 산업자본의 대외 시장 진출 가능성이 높아질 뿐이다. 하지만 농사, 혹은 영화를 포기할 경우 '자동'으로 잃게 되는 것은 엄청 많다. 단지 쌀을 잃거나, 영화제작편수가 줄어드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농촌 그 자체가 사라지고, 영화의 전후방 연관 산업이 동시에 침체로 접어들 수 있다. 쌀과 영화를 포기하고 다른 제품을 보호하는 것이 '국익'이라는 논리는 솔직히 이해할 수 없다. 그저 쌘놈들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이해할 수 있다. 이 같은 사회를 우리는 '천민자본주의'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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