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렁한 오리엔탈리즘만 가득
헐렁한 오리엔탈리즘만 가득
  • 이정우 기자
  • 승인 2006.02.11 0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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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기자의 영화읽기]〈게이샤의 추억〉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서양의 시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유럽(미국을 포함한)이 유럽 이외의 문화권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신비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인디아나존스〉에 등장하는 밀교집단, 〈킹콩〉에서 소개되는 흑인 무리들, 〈붉은 사슴비〉가 묘사하는 인디언 종족이 모두 오리엔탈리즘의 프레임에 의해 만들어진 사례다.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문화를 신비화시키는 오리엔탈리즘은 여성의 은밀한 곳을 탐내는 남성의 시각이다. 또 한편으로 오리엔탈리즘의 그 신비주의는 유럽 아닌 곳의 문화를 비합리적이라고 단정한다. 풀리는 의문은 신비스럽지 않다. 의문은 풀리지 않아야 신비롭다. 오리엔탈리즘이 문제인 것은 유럽의 방식으로 풀리지 않는다고 해서 의문을 신비화시키는 것이다. 유럽의 방식은'합리'이다. 수학적, 화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문화를 통틀어'신비'하다고 말하는 것이 오리엔탈리즘이다.

유럽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명하지 못한다. 머큐리의 날개모자도, 메두사의 뱀머리도 증명하지 못한다. 출입문에 걸어놓은 말발굽이 어떻게 액을 몰아내는지도 증명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신비롭지 않다. 자신들의 문화는 당연하고, 남의 문화는 이상(신비의 다른 말이다)하게 보는 오리엔탈리즘은, 그래서 편견이다.

〈게이샤의 추억〉이 재미없는 이유 1

▲ 게이샤의 추억 〈게이샤의 추억〉의 감독은 〈시카고〉(르네 젤위거, 캐서린 제타 존스 주연, 2002)를 만든 롭 마셜이다. 〈시카고〉의 두 여주인공은 시카고의 게이샤들이다. 그들은 철저히 이익을 쫓아 노래 부르고 춤춘다. 욕망덩어리들이다. 그런데 〈게이샤의 추억〉의 게이샤는 사랑, 자존심, 질투에 따라 분을 바르고 기모노를 입는다. 이념덩어리들이다. 〈시카고〉는 사람을 보여주고, 〈게이샤의 추억〉은 게이샤 이념을 목숨처럼 아끼는 인형게이샤를 보여준다. 인형은 말한다. “난 몸을 팔지 않아, 난 예술가야.” 그래서 〈시카고〉는 재미있고, 〈게이샤의 추억〉은 재미없다. 스스로 예술가임을 자처하는 사람치고 예술 제대로 하는 사람 드문 법이다. 영화 〈게이샤의 추억〉은, 전형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매우'훌륭한' 오리엔탈리즘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일본문화 숭배라는 모양을 띤 이 오리엔탈리즘은 〈라스트 사무라이〉(에드워드 즈윅 감독, 톰 크루즈 주연, 2004)에서도'훌륭하게' 표현됐었다. 이 두 영화가 각각 게이샤와 사무라이에 접근하는 방식은 연역적이다. 사실을 종합해 의미에 도달하지 않고 미리 규정한 의미를 강조(또는 강요)할 요량으로 선택된 사실을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미리 규정한 의미'가 바로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다. 영화가 말하는 예술가로서 게이샤를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게이샤의 추억〉은 이야기의 흐름, 배우의 연기에 몰입되기 힘든 영화다. 까닭은 감독의 시선이 거칠게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영화에 감독의 시선이 들어 있기 마련인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영화 속에 자연스레 녹아 있느냐, 거친 형태로 관객에게 노출되어 있느냐, 일 것이다. 〈게이샤의 추억〉이 노출시키고 있는 감독의 시선은'우리는 일본 게이샤 문화를 숭배합니다'라는 것. 그나마 이 시선은 화면이나 이야기보다 나레이션이라는'말'에 더 의존하고 있다.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게이샤 연구자의 영상프리젠테이션을 감상하는 느낌이었다. 당연히 재미는 떨어진다. 재미없는 이유 2 ▲ 장쯔이, 공리, 양자경 등 여배우 트로이카는 〈게이샤의 추억〉과 어울리지 않는다. -게이샤의 추억
〈게시야의 추억〉은 말한다. 게이샤가 게이샤이기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비밀'이라고. 실제로 한 여성이 게이샤가 되면 개인의 신상에 관한 것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진다고 한다. 게이샤가 몸을 단장하는 곳은 가까운 친척이라 해도 들어갈 수 없다. 그로테스크하다는 말이 꼭 맞는 두터운 화장, 제대로 차려입을 경우 20kg에 달하는 기모노 등이 모두'비밀'과 관련이 있다. 비밀은 궁금증을 높이고, 그 궁금증이 여성에 관한 것이라면 곧바로 섹슈얼리티에 연결될 것이다. 이 지점에 게이샤라는 직업이 존재한다는 것이 영화의 설명이다.

그런 면에서 장쯔이, 공리, 양자경 등 여배우 트로이카는 〈게이샤의 추억〉과 어울리지 않는다. 비밀이 최대 컨셉인 영화의 주인공들이 별로 궁금할 것도 없는 세계적인 스타배우들이라니 이해할 수 없는 캐스팅이다. 더군다나 양자경과 장쯔이는 〈예스마담〉 〈와호장룡〉 등 액션영화를 통해 스타덤에 오른 이들이다. 이들에게 신비, 섹시 따위의 정서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와호장룡〉에서 기가 막힌 대결 장면을 연출했던 양자경과 장쯔이가 기노모를 입고 종종걸음을 걷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금방이라도 사무라이들과 한 액션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주인공이 연출하는 정서에 관객이 동화되지 않는 영화는 결코 좋은, 혹은 재미있는, 혹은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평가 할 수 없다.

할리우드 영화의'색' 욕망

   
▲ 게이샤의 추억
최근 몇 년 사이 중국과 한국영화들은 매우 현란한 색감을 자랑하고 있다. 〈영웅〉 〈연인〉〈무극〉〈스캔들〉〈형사〉〈왕의남자〉등이 그렇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할리우드와 유럽의 영화들에게서 이처럼 화려한'색'을 경험한 기억이 없다. 이는 단순한 영화기술의 차이라기보다 문화의 차이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색을 쓰려 해도 자기 문화의 전통 안에 중국이나 한국, 또는 일본과 같은 화려한 색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게이샤의 추억〉은 색을 제대로 써보지 못한 할리우드가 아시아의 색에 눈을 돌린 결과 나온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킬빌〉(쿠엔틴 타란티노 감독)도 마찬가지다.) 로트렉, 고흐, 마네 등 인상주의 화가들이 우키요에(일본판화)에 반했듯이 할리우드는 게이샤의 기모노와 화장과 부채춤에 눈이 번쩍 뜨인 것이 아닐까. 당초 이 영화의 메가폰을 잡으려다 제작으로 돌아선 스필버그는 실제로'일본광'이기도 하다.

문제는 일본 게이샤 문화를 이야기하는 방식으로서'영어로 말하는 중국 배우'를 기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막의 불편함도 감수하지 못하는 영어권 관객을 위해 아시아 문화 하나가'이용'됐다는 찜찜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다. 포스터에 박힌 게이샤의 눈동자는 푸른색이다. 게이샤 문화의 껍질만 욕심낸 셈이다. 그러다 보니 연기, 이야기 구조 모두가 할리우드 방식이다. 일본은 없다. 결국 그들이 갈망했던'색'도 구현하지 못했다.

아시아(일본)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기대하는 일은 요원한 것일까. 그들은 21세기에 들어서도 아시아에 대한 왜곡된 접근, 편견을 일삼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럴 의지도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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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담 2006-02-23 11:53:51
그렇담 찬-반을 두리뭉실 얼버무려야 하나...

샹디 2006-02-20 11:13:27
기사는 과반수 라는 수 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해도 남이 듣기에 껄끄러운 면이 있다면 과반수 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관계로 그 의견이나 생각은 무시당하기 쉽다.
게이샤의 추억이라는 영화에 대해 평한 부분이있는데 게이샤의 추억이 재미없는 영화라고 해도 재미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말하는 기자의 말은 그저 의견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다. 실제로 장쯔이나 장만옥 등 액션스타 로 스타덤에 오른 여인들을 섹시하다고 생각하는 부류가 의외로 많다. 은근히 강한 여성이 이성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을 모르고 함부로 그녀들을 평하는 일은 모순이 아닌가 싶다. 게이샤의 추억에 이들이 나와도 열광하는 팬들 역시 적지 않다. 기자의 너무 극단적인 생각이 껄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