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기자의 영화읽기]〈게이샤의 추억〉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서양의 시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유럽(미국을 포함한)이 유럽 이외의 문화권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신비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인디아나존스〉에 등장하는 밀교집단, 〈킹콩〉에서 소개되는 흑인 무리들, 〈붉은 사슴비〉가 묘사하는 인디언 종족이 모두 오리엔탈리즘의 프레임에 의해 만들어진 사례다.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문화를 신비화시키는 오리엔탈리즘은 여성의 은밀한 곳을 탐내는 남성의 시각이다. 또 한편으로 오리엔탈리즘의 그 신비주의는 유럽 아닌 곳의 문화를 비합리적이라고 단정한다. 풀리는 의문은 신비스럽지 않다. 의문은 풀리지 않아야 신비롭다. 오리엔탈리즘이 문제인 것은 유럽의 방식으로 풀리지 않는다고 해서 의문을 신비화시키는 것이다. 유럽의 방식은'합리'이다. 수학적, 화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문화를 통틀어'신비'하다고 말하는 것이 오리엔탈리즘이다.
유럽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명하지 못한다. 머큐리의 날개모자도, 메두사의 뱀머리도 증명하지 못한다. 출입문에 걸어놓은 말발굽이 어떻게 액을 몰아내는지도 증명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신비롭지 않다. 자신들의 문화는 당연하고, 남의 문화는 이상(신비의 다른 말이다)하게 보는 오리엔탈리즘은, 그래서 편견이다.
〈게이샤의 추억〉이 재미없는 이유 1
그런 면에서 장쯔이, 공리, 양자경 등 여배우 트로이카는 〈게이샤의 추억〉과 어울리지 않는다. 비밀이 최대 컨셉인 영화의 주인공들이 별로 궁금할 것도 없는 세계적인 스타배우들이라니 이해할 수 없는 캐스팅이다. 더군다나 양자경과 장쯔이는 〈예스마담〉 〈와호장룡〉 등 액션영화를 통해 스타덤에 오른 이들이다. 이들에게 신비, 섹시 따위의 정서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와호장룡〉에서 기가 막힌 대결 장면을 연출했던 양자경과 장쯔이가 기노모를 입고 종종걸음을 걷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금방이라도 사무라이들과 한 액션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주인공이 연출하는 정서에 관객이 동화되지 않는 영화는 결코 좋은, 혹은 재미있는, 혹은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평가 할 수 없다.
할리우드 영화의'색' 욕망
▲ 게이샤의 추억 | ||
〈게이샤의 추억〉은 색을 제대로 써보지 못한 할리우드가 아시아의 색에 눈을 돌린 결과 나온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킬빌〉(쿠엔틴 타란티노 감독)도 마찬가지다.) 로트렉, 고흐, 마네 등 인상주의 화가들이 우키요에(일본판화)에 반했듯이 할리우드는 게이샤의 기모노와 화장과 부채춤에 눈이 번쩍 뜨인 것이 아닐까. 당초 이 영화의 메가폰을 잡으려다 제작으로 돌아선 스필버그는 실제로'일본광'이기도 하다.
문제는 일본 게이샤 문화를 이야기하는 방식으로서'영어로 말하는 중국 배우'를 기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막의 불편함도 감수하지 못하는 영어권 관객을 위해 아시아 문화 하나가'이용'됐다는 찜찜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다. 포스터에 박힌 게이샤의 눈동자는 푸른색이다. 게이샤 문화의 껍질만 욕심낸 셈이다. 그러다 보니 연기, 이야기 구조 모두가 할리우드 방식이다. 일본은 없다. 결국 그들이 갈망했던'색'도 구현하지 못했다.
아시아(일본)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기대하는 일은 요원한 것일까. 그들은 21세기에 들어서도 아시아에 대한 왜곡된 접근, 편견을 일삼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럴 의지도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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