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옛 등걸에
매화 옛 등걸에
  • 시민의소리
  • 승인 2006.0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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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시평]정규철 반부패국민연대 광주전남 상임대표
눈이 쌓이고 찬바람이 불어 세상이 온통 매운 기운으로 가득하다. 난방문화권 밖 사람들에게는 겨울이 무서운 공포로 다가설 것 같다.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총 맞아서 죽었다던 빨치산의 입산 투쟁보다 더 처절했던 80년대의 설한처럼.

백면서생으로 살다가 잡혀가 반 평짜리 독감방 생활 일 년 하고나니 사대삭신은 성한 데가 없고 정신마저 황량했다. 그럭저럭 세월만 까먹고 지내던 어느 해던가 정초에 그림 그리는 선배 한 분이 안부 서찰을 보내왔었다.

연하장을 대신한 것 같았는데 백매(白梅)에 참새 한 마리를 앉히고 화제를 세한도(歲寒圖)라 썼다. 용의 몸뚱이처럼 뒤틀려 올라간 곳에 성긴 가지가 군데군데 뻗고 그 위에 띄엄띄엄 몇 개씩 꽃망울이 맺거나 피어 그윽한 향기를 내뿜고 있는 그림이었다. 엄동을 두려위 하지 않는 매화의 강인함을 보자 멍하던 정신이 번쩍 깨었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반가운 매화라고나 할까? 치욕, 울분, 비분강개가 순간 겸연쩍어지는 것이 아닌가.

'세한'(날이 차가워진)이라는 표현은 논어의 '추위가 닥친 뒤에라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는 글을 따다가 그림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조선시대 유생들이 즐겨 암송하던 글귀이기도 하지만 완당(阮堂)이 적거지인 제주에서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산수화의 화제로 더 유명해졌다.

유홍준은 완당의 세한도를 '천하의 명작'이라고 했다. 이상적은 역관이면서 공부가 실하여 시서(詩書)에 능하고 조청 문화교류에 크게 이바지한 당대의 큰 학자이다. 그는 연경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그 곳의 학예자료를 수입하여 들여오곤 하였는데 이렇게 들여온 책 가운데〈만학〉과 〈대운〉 그리고 〈황조경세문편〉 120권 79책을 제주로 보냈다. 실로 방대한 분량의 책이다. 교통이 편리한 오늘날에도 지인에게 책 한 권 선물하기가 쉽지 않는 일인데, 하물며 북경에 오가자면 석 달씩 걸리는 거리인 것을 감안하면 이만저만한 정성이 아닐 수 없다. 평소에 자기를 좋아하던 사람도 자기가 위기에 처하면 멀어지기 쉬운데 이상적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도리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입신만을 위해 천방지축 날뛰면서 귄좌를 탐내는 박덕한 자였다면 어찌 흉내라도 낼 수 있었겠는가.

완당은 그런 제자를 그림으로 그리고 발문에 붙이면서 “세상은 흐르는 물살처럼 오로지 권세와 이익에 수없이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주었도다…” 라고 적었다. 완당이 살던 시대는 정치가 막다른 길로 치닫고 있던 세도정치 시기였다. 특정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고 매관매직을 일삼아서 탐관오리들은 무고한 백성들을 주리틀기 일쑤였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다산선생이 지적했던 대로 “온 세상이 썩은 지 이미 오래다. (天下腐已久)” 부패하다 못해 썩어 문드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배들은 탐욕에만 눈이 멀어서 정쟁이 끊일 날이 없었다.

자연주의는 우리 미술의 특색이자 겨레의 개성이기도 하다. 마음이 일그러지면 자연현상의 순수함을 바로 볼 수 없듯이 우리의 선인들은 교육과 교양을 으뜸으로 삼아 심성을 바르게 한 다음 비로소 출사하였다.

요즘 세상이 시끄럽다. 3김 시대의 잔당들이 지역을 볼모로 잡고 한탕 칠 계략에 골몰하는가 하면, 어깨띠를 두르고 거리로 나가 '구국투쟁'운운한다. 그들은 도리를 어기고 막가고 있다. 이런 현상들의 뿌리를 캐보면 서당개 식 어깨너머로 배운 정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행위에 박수를 보내는 무리들의 정신상태 역시 '개발독재' 시대가 좋았다는 퇴보사관에 기초한다. 우리의 의식부터 바로 잡지 않으면 나라는 결단코 바로 서지 못할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엄동을 두려워하지 않는 매화의 강인함을 배울 일이다.

/정규철 반부패국민연대 광주전남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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