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비축미곡 매입을 마치면서...
공공비축미곡 매입을 마치면서...
  • 이재광
  • 승인 2006.01.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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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눈]
“물나락 낸 것은 어떻게 되었당가?”

누군가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는가 싶더니, 필자가 앉아 있는 책상 앞에 와서 멈춘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이 어딘가에서 재롱을 부리고 있을 손자녀석이 살아온 시간보다 더 많지 않을 듯한 초라하게만 보이는 노인네다. 간혹 황당하게만 느껴지는 이런 질문 앞에 곤혹을 치루는 때가 있곤 한다.

예전 같았으면 소일거리로 비닐하우스에 채소 같은 것을 심어 시장에 내다 파는 재미가 솔솔 할텐데. 요즘은 그렇지도 못하다. 농촌인구의 초고령화도 문제지만, 난방용 기름값이 결코 만만치 않은지라 그 마져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마을회관 같은데 모여서 그런저런 얘기로 하루해를 보내는 것이 농촌의 현실이다. 어쩌면, 이 어르신도 마을회관에 모여 같은 노인네들끼리 얘기를 나누시다가 '공공비축미곡 매입가확정'발표 뉴스를 듣고 나온듯 싶다.

무슨 얘긴가 하고 물었더니, 지난해 10월 언제쯤 공공비축물량으로 물벼를 출하했는데, 포대벼는 산지 쌀값을 반영한 확정된 금액이라 해서 가마당 1,100원(1등품 가격)씩을 준다는데, 산물벼로 낸 벼는 그런 것이 없느냐는 것이다.

하고자 하는 얘기는...

지난해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읍면에 배정된 채 2만 가마니도 안 되는 공공비축 미곡을 매입하면서 겪었던 일이다. 그렇다. ‘공공비축제’ 생전 들어 보지도 못한 단어였던지라 생소하기만 했다. 말도 많았던게 사실이다. 산물벼와 포대벼는 무엇이며, 예년 수매량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매입량에 우선지급 금액이라 해서 지급되는 금액은 또 무엇인가? 과년도에 비해 가마당 1만원 이상 적은 금액에. 또 물벼는 그런 가격결정도 없이 매입자가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식의 정책부터가 모순이라면 모순이였다.

'농민단체의 천만석 야적투쟁'을 은근히(?) 지지하면서 서너 차례에 걸쳐 몇몇 언론에 농민여론에 대한 기고도 서슴치 않았다. 또,12월 서울집회에 참가하는 농민단체의 젊은 친구편에 먼 길 조심해서 다녀오라면서 휴게소에 들려 따뜻한 음료수라도 사서 마시라는 성의 표시도 잊지 않았었다. 물론, 공직자이기에 그렇게 까지 해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러는 과정에 다소 듣기 거북한 얘기도 들었고, 또 진정 이 나라 이 땅 농업과 농촌을 고민하는 이들로 부터는 격려와 찬사도 받았다.

사실. 행정의 최일선 농정부서에 몸 담아 오면서 느끼는 일이지만 불합리한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런 것들에 대한 건의를 한다고 해서 쉽사리 개선되지 않으리라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주민 대다수의 의견이 그렇다면 한번쯤 귀담아 듣고 개선을 요구할 필요성을 느끼고 또 그렇게 되도록 해야 하는 게 ‘녹’을 먹는 자는 도리라 생각한다.

물벼를 낼 것인가? 말 것인가?

공무원이기에 지시내용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지라 마을별 배정과 해당기관에 통보까지는 마무리를 했다. 또, 필자가 몸 담고 있는 곳은 농민단체의 활동이 전무하다 시피한 지역이다 보니, 500여 가마를 쌀대책위(?)에 별도 배정하면서 한 목소리를 내 달라는 당부도 아끼지 않았다. 궤를 같이 한 농림부의 추가 백만섬 매입결정과 물벼의 포대벼 전환방침은 내게 또 한 번의 야간근무를 강요(?)했다. 까지껏 농민들을 위하는 일이라면 한 번이 아니라, 열 번 스무 번도 마다하지 않을 일이기에 웃으면서 말이다.

문제는, 야적시위가 장기화 되면서 겪어야 했던 우여곡절이다. "정부를 어찌 이긴다냐!"라며 지례 겁부터 먹는 사람들 때문이다. 그 무렵에 이 지역에서도 성급한 나머지 산물벼로 출하를 한 물량이 제법 된다. 전체 매입물량 14,000여 가마니 중 3,900여 가마니나 물벼로 출하를 했으니까! 사실, 한 목소리를 내기로 했는데, 우선 급한 불부터 끄고 보겠다는듯 생산비에도 훨씬 못 미치는 턱없이 낮은 가격에 나락을 내다 파는 사람들이 미웠다. 또 다른 한편으론 오죽했으면 애지중지 키운 나락을 헐값에 투매 하다시피 할까? 하는 아쉬움이 들더라는 것이다.

추가매입이 결정되기 전, 군 전체 매입량 99,300여 가마니 중 24,400여 가마니를 42,000원씩 물벼로 팔았으니, 전국 쌀값 평균을 고려해 결정된 가격(1등)과 비교를 해보면 가마당 6,450원, 1억5천7백여 만원의 손해를 보고 판셈이다. 그렇다면, 생산농민들이 손해를 본 6,450원(가마당)이라는 이익을 누가 챙겼을까? 그렇다. 매입업자, 즉 RPC 운영자들인 셈이다. 어찌보면, 그들은 원료곡을 싼 값에 쉽게 확보한 것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했던가? 이제 어느 정도 원료곡을 확보했는지! 그 말도 많은 공공비축미곡 매입에서 차라리 손을 떼겠다며 약정해지를 해왔다는 공문을 접할 때는 욕이 절로 나왔다.

한 가지 웃지 못할 일이 또 있다.

매입 일정이 자꾸 연기되다 보니, 대다수 농가들이 꾸역꾸역 다가오는 년말 대출금 상환 때문에 정부 비축물량으로 배정받은 나락가마니를 물벼보다 몇 천원 더 얹여 주는 시중 상인들한테 내다 팔고 정작 비축매입에 출하할 나락이 없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다. 벌써 몇 번을 연기했던가? 매입 첫날 살을 도려내는 듯한 눈발도 한몫 했겠지만, 계획량의 1/3도 안 되는 물량만 출하장에 나왔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던지 목표량(?)은 채워야 겠기에, 농가 약정물량과 상관없이 출하에 임한 물량 전량을 실제 출하자에게 매입증명서를 발행해 놓고 보니, 거느적 거리는 게 또 있었다. 돈을 지급해야 하는 농협으로서는 계획량 보다 더 나오게 되면 문제가 된다며 당초 농가별 약정물량 그 이상은 대금을 지급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죽일 놈의 일판이...’ 차후 문제가 생기면 전적으로 책임을 지겠다며 매입증명서대로 대금을 입금해 달라는 협조를 구했다. 물론, 이것은 추후 차액 정산까지를 고려한 조치였다.

두 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지나놓고 보니 허탈한 웃음 밖에 나오지 않지만, 말도 많았고, 사연도 많았던 공공비축제 였다. 어쩌면, 집회에 참가했다가 공권력이라는 방패와 곤봉에 맞아 죽어간 故 전용철 열사의 주검이 장례조차 치루지 못한 채 냉동창고에 누워 있어야만 했던 그 37일간 이라는 시간보다 짧은 ‘공공비축미곡 매입기간’ 이였지만, 추위를 참지 못하는 필자로선 칠흑과도 같은 시간들 이였다. 마치 사시나무 떨듯 오돌오돌 떨면서 지낸 시간들은 두 번 다시 더듬고 싶지가 않다.

그래도 아직은 젊다는 필자가 이럴 때, 정작 나이 드신 저 농민들은 오죽할까? 칠순은 되어 보이는 노인네가 털털거리는 경운기에 나락 가마니를 실고 와서 내리는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볼 수 없는지라 시린 손 불어가며 거둘기도 하고, 포대에 출하자 이름석자를 대신해서 써 주기도 했다. 여름내 그을린 까아만 피부위로 짙게 드리어진 어둠이 쌀농사를 포기하지 못하시는 고향의 부모님 모습처럼 눈에 선하기만 와 닿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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