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아 장하고나!”
“감독아 장하고나!”
  • 이정우 기자
  • 승인 2006.01.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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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기자의영화읽기]왕의 남자
인간이 제 편리를 위해 만들어 놓은 ‘달력’이 역사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한국사의 여러 국면들이 10년 단위로 재편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테면 4.19혁명(1960)에서 5.16군사쿠데타(1961)로 이어지는 한국현대사의 숨가쁜 시기에 시인 김수영은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1961.8)는 유명한 문구를 날렸고, 대략 10년 뒤 김지하는 김수영의 시를 의도적으로 오독해 “풍자냐 자살이냐”(1970)는 질문을 던졌다.

다시 10년 뒤, 학살의 80년대는 “풍자가 아니면 직설”이었다. “내 시는 시가 아니어도 좋다”는 문병란 시인의 말이 여기에 닿아 있고, “(시는)백병전의 단도여야 한다”는 김남주 시인의 발언이 직설을 지시했던 것이다.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

▲ 장생과 공길의 줄타기 ⓒ왕의남자 일찍이 [황산벌]을 통해 남다른 역사관을 과시했던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는 풍자를 업으로 삼고 있는 광대들의 고단한 처지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우화일 뿐, 감독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예술의 가능성과 한계, 혹은 예술가의 선택 문제이다. 광대 장생(감우성)은 도도한 풍자로 세상에 나서고자 했고, 머지않아 그 바람은 이루어졌다. 연산군(정진영)과 장녹수(강성연)를 성적으로 풍자함으로서 그들은 왕에게 인정받았다. 자신들을 비꼬는 연희무대인데도 풍자의 매력에 빠져 연산군과 장녹수는 광대를 궁으로 들어앉힌 것이다. 사건은 광대들이 가지고 있는 풍자의 힘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면서 생겨난다. 광대들이 공연을 할 때마다 궁은 피바다로 변한다. 풍자가 현실의 힘으로 변환되는 이 순간에 장생을 중심으로 한 광대패들은 풍자를 계속할 수도, 멈출 수도 없는 교착상태에 빠진다. 궁을 떠나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선택이지만, 공길(이준기)과 연산군의 사랑 비슷한 관계 때문에 그러지도 못한다. 이후 영화는 더 이상 풍자할 수 없는 광대들이 때로는 직설을, 어느 때는 자살을, 그리고 마침내는 해탈을 선택하는, 광대의 운명, 곧 예술(가)의 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어느 시대의 예술가이고 간에 “풍자가 아니면…”이라는 가정법 앞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풍자의 길이 막혔을 때 광대들은 두 가지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저항할 것이냐, 도피할 것이냐. 도피할 수 없었던 장생과 공길은 (상징적)자살과 직설로 왕에게 저항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함께 줄놀이를 하면서 하늘 높이 튕겨 올라 해탈에 이른다. 더 이상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면에서 그 해탈은 어둡고 우울하다. 그럼에도 정신의 자유만큼은 하늘을 향하고 있으니 승리자는 왕이 아니라 그들이다. 영화 속 놀이판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노랫말 같은 대사가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인데, 이는 “…누이야 /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 / 네가 그렇고 / 내가 그렇고 / 네가 아니면 내가 그렇다…”는 김수영의 싯구(시의 제목은 [누이야 장하고나! -新歸去來7]이다)와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말하자면 영화는 김수영의 ‘해탈’ 개념이 자살과 직설까지를 끌어안고 있다는, 유장한 해석까지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풍자의 길이 막혔을 때 자살과 직설을 마다하지 않아야, 예술은 절대자유, 초월로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는 영화가 [왕의 남자]인 것이다. 우리 영화의 장르적 가능성 활짝 열려 ▲ 장생과 공길ⓒ왕의남자
이야기 구조에서 영화의 미덕은 여럿이다. 공길과 연산군의 미묘한 애정관계가 다만 임금의 남색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정서적 교호작용 때문이라는 설정이 설득력 있고, 매 국면마다 광대로서 장생의 고뇌가, 시대를 뛰어 넘어 예술가의 그것과 일맥상통하게 그려진 점 또한 매력적이다. 풍자를 수용할 줄 알고, 유년의 상처를 간직한 섬세한 감수성의 연산군 상을 창조해낸 점도 빼어나다.

그럼에도 여전히 ‘폭군’으로 연산군을 규정하는 태도는 아쉽다. 그가 폭군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기존의 주류 역사관을 배반하거나, 다른 각도에서 조명해보는 ‘비틀기’의 즐거움이 빠져 서운하다는 이야기다. 맨 마지막 에필로그 화면은 차라리 없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줄에서 하늘로 튕겨 오르는 이전 화면의 강렬한 느낌을 반감시켜버리는 ‘사족’으로 보인다.

[왕의 남자]가 주는 가장 또 다른 의미는 우리 역사의 화려한 재구성이다. [스캔들]이 그러했듯이 [왕의 남자]가 묘사한 16세기 조선시대는 역동적이고, 섬세하며, 한없이 찬란하다. 당시 백성들은 가렴주구에 시달렸다는 민중주의적 시각을 굳이 들이댈 필요는 없다. 최고 권력자의 삶은 곧 당대 문화력의 총체적 표현인 셈이니, 궁중의 화려함을 우리문화의 자부심으로 삼는다 해서 어긋날 일은 아닐 터이다.

[황산벌][혈의누][왕의 남자]… 한국 사극영화의 층이 점점 더 두터워지고 있다.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추구하는 그 태도 또한 믿음직스럽다. 서동요, 낙랑공주, 주몽신화… 5천년 역사 속에 알알히 박힌 숱한 아이템들이 있으니 더 많이 욕심내고 싶다. 우리 영화의 장르적 가능성을 활짝 열어 놓은 [왕의 남자]가 한없이 고맙다. 감독아 장하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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