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제 편리를 위해 만들어 놓은 ‘달력’이 역사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한국사의 여러 국면들이 10년 단위로 재편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테면 4.19혁명(1960)에서
5.16군사쿠데타(1961)로 이어지는 한국현대사의 숨가쁜 시기에 시인 김수영은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1961.8)는 유명한 문구를
날렸고, 대략 10년 뒤 김지하는 김수영의 시를 의도적으로 오독해 “풍자냐 자살이냐”(1970)는 질문을 던졌다.
다시 10년 뒤, 학살의 80년대는 “풍자가 아니면 직설”이었다. “내 시는 시가 아니어도 좋다”는 문병란 시인의 말이 여기에 닿아 있고, “(시는)백병전의 단도여야 한다”는 김남주 시인의 발언이 직설을 지시했던 것이다.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
이야기 구조에서 영화의 미덕은 여럿이다. 공길과 연산군의 미묘한 애정관계가 다만 임금의 남색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정서적 교호작용 때문이라는 설정이 설득력 있고, 매 국면마다 광대로서 장생의 고뇌가, 시대를 뛰어 넘어 예술가의 그것과 일맥상통하게
그려진 점 또한 매력적이다. 풍자를 수용할 줄 알고, 유년의 상처를 간직한 섬세한 감수성의 연산군 상을 창조해낸 점도 빼어나다.
그럼에도 여전히 ‘폭군’으로 연산군을 규정하는 태도는 아쉽다. 그가 폭군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기존의 주류 역사관을 배반하거나, 다른 각도에서 조명해보는 ‘비틀기’의 즐거움이 빠져 서운하다는 이야기다. 맨 마지막 에필로그 화면은 차라리 없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줄에서 하늘로 튕겨 오르는 이전 화면의 강렬한 느낌을 반감시켜버리는 ‘사족’으로 보인다.
[왕의 남자]가 주는 가장 또 다른 의미는 우리 역사의 화려한 재구성이다. [스캔들]이 그러했듯이
[왕의 남자]가 묘사한 16세기 조선시대는 역동적이고, 섬세하며, 한없이 찬란하다. 당시 백성들은 가렴주구에 시달렸다는 민중주의적 시각을 굳이
들이댈 필요는 없다. 최고 권력자의 삶은 곧 당대 문화력의 총체적 표현인 셈이니, 궁중의 화려함을 우리문화의 자부심으로 삼는다 해서 어긋날 일은
아닐 터이다.
[황산벌][혈의누][왕의 남자]… 한국 사극영화의 층이 점점 더 두터워지고 있다.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추구하는 그 태도 또한 믿음직스럽다. 서동요, 낙랑공주, 주몽신화… 5천년 역사 속에 알알히 박힌 숱한 아이템들이 있으니 더 많이 욕심내고 싶다. 우리 영화의 장르적 가능성을 활짝 열어 놓은 [왕의 남자]가 한없이 고맙다. 감독아 장하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