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를 흔들고 있는 ‘황우석 사건’을 계기로 ‘국익’과 ‘진실’의 싸움이
치열하다. 하지만 이 싸움은 치열한 만큼 불합리하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나머지 하나를 건질 수 있다는 잘못된 전제를 바탕으로 짜여졌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국익을 추구한다면 진실을 좇아야 한다는 게 상식이다. 이 상식은, 진실을 좇는 결과 국익에 해가됐다는 역사적 사실이 별로
발견되지 않았는 다는 점에서 최소한 통계적으로나마 ‘옳다’는 생각이다. 둘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있어 온 국익과 진실 공방은, 그럼에도 장차 사라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세상사가 늘
‘합리적’으로 흘러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까닭에 문화예술, 특히 영화에서 이 주제는 많이 다뤄졌었다. 특히 국가주의 이데올로기가 강력한
미국(할리우드) 영화에서 이 같은 주제의 반복재생산이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의 할리우드 영화는 ‘진실’에 승리의 깃발을 꽂는다. 미국의 실상이 국익 우선 정책을 남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이러니’라기 보다는 ‘이중성’이다. 대외 정책에서는 ‘국익’을, 대내적으로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사회 내부의 문제를 다루면서 ‘진실’을 중요시한 할리우드 영화들을 소개한다.
# 〈어 퓨
굿맨〉(1992)
조직으로부터
소외당한 수사관 제프리스(부르스 윌리스)와 아홉살 난 자폐증 소년의 인간미 넘치는 관계를 그린 액션 드라마. 자폐아 사이먼이 퍼즐잡지에 실린
국가안보국의 비밀코드 ‘머큐리’를 풀어내자, 국가안보국의 간부 니콜라스(알렉 볼드윈)는 소년을 포함해 가족을 모두 살해하려다 소년을
놓친다.
니콜라스에 따르면, 그가 소년을 죽이려 한 이유는 “세계 각국에 퍼져 있는 정보요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암호가 해독되면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기 때문에, 누군가가 소년을 활용하기 이전에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국익론’이다.
실상 니콜라스는 국익을 핑계 삼아 허가를 받지도 않고 ‘머큐리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다. 자기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던 것이다. 이 영화의 니콜라스가 ‘황우석’과 닮았다고 하면 과장일까. 어쨌든 소년과 부르스 윌리스가 이기고, 니콜라스가 진다. 각국에 파견된 미국 정보원들에게는 아무일도 생기지 않는다.
#〈코드네임 콘돌〉(1975)
1964년 여름, 미국 미시시피주의에서 흑인들의 참정권을 주장하던 3명의 백인 인권단체 대학생이 실종된다.(실제 일어난 일이다. 사실은 살해됐다.) 이를 수사하기 위해 연방수사국 워드(진 해크만)와 앤더슨(윌리엄 데포)이 현장에 파견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K.K.K단의 보복이 두려워 협조를 거부하고, 지방유지와 경찰서장 또한 모두 인종주의적 편견을 가지고 수사를 방해한다.
이 영화의 대립은 ‘백인우월주의’ 대 ‘진실’이다. 하지만 미시시피의 백인들이 ‘백인우월주의=국익’으로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 영화의 깊은 속내는 다시 ‘국익’ 대 ‘진실’로 치환된다. 영화는 진실의 승리로 끝난다.
〈미시시피버닝〉의 미덕은 백인우월주의라는 ‘편견’을 철학적으로 성찰했다는 사실이다. 흑백의 차별은 동시에 남녀의 차별을 낳고, 또 그 차별은 어른과 아이, 가난한 자와 부자, 권력자와 보통사랑 등으로 끊임없는 확대된다는 진실이 영화 속에 묘사되어 있다. 이를테면 영화는, 아내와 아이에게 폭력적인 백인우월주의 남성 아이콘을 절묘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국익과
진실 싸움을 담은 영화는 많다. 그 영화들은 대부분 ‘진실’을 옹호하고 있다. 동시에 국익이라는 것이, 실상은 개인(혹은 특정 집단)의 사적
이익의 이데올로기적 포장이라는 점 또한 폭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