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버스터와 슬리퍼히트
블록버스터와 슬리퍼히트
  • 이정우 기자
  • 승인 2005.11.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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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기자의 영화읽기]
도시의 한 블록(block)을 한방에 날려버릴(burst) 수 있는 대형 폭탄. 사전이 설명하는 ‘블럭버스터’의 뜻이다.

영화에서 이 말은 ‘엄청난 물량공세(제작·홍보비) + 특급스타 + 전국(또는 전세계)의 수많은 상영관 동시개봉 + 알파’ 등을 통해 순식간에 제작비를 회수하고 이윤을 늘리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작품을 의미한다.

물론 블록버스터가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제임스 카메론은 [타이타닉 ]을 만들어 돈방석에 올랐지만, 캐빈 코스트너는 [워터월드] 참패로 하마터면 영화인생에 종지부를 찍을 뻔 했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으로 장선우는 ‘거의’ 사기꾼의 반열에 오른 반면, 강제규는 [태극기 휘날리며 ]를 만들고 나서 ‘거의’ 애국지사가 되기도 했다.

▲ 말아톤. 참신한 아이디어, 상대적인 저예산으로 만든영화인데 크게 흥행했다. 꼭 같은 의미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슬리퍼히트"에 닿아있다. 슬리퍼히트(sleeper hit). 블록버스터의 반대편에 있는 말이다. 큰 기대 없이 저예산으로 만들었는데 의외로 입소문을 타고 흥행하는 경우, 또는 흥행을 예측하기는 힘들지만 참신한 아이디어를 바탕삼아 ‘상대적’ 저예산으로 만든 영화가 시장에서 제대로 먹힐 때 평자들은 ‘슬리퍼 히트’라는 말을 동원한다. 할리우드 작품으로는 [사랑과 영혼] [귀여운 여인 ]등이 슬리퍼 히트를 노리고 만들어져 성공한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겠고, 한국의 경우 [집으로… ]나 [말아톤 ]을 들 수 있다.(한국의 두 영화는, 할리우드의 두 영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잘 만들어졌고, 또 예의 노림수 또한 약했다는 점에서 ‘슬리퍼히트’로 설명하기에는 난감한 점이 있다. 다만 ‘결과적 현상’이 슬리퍼 히트에 닿아 있다.) 블록버스터와 슬리퍼 히트 오래전부터 할리우드는 블록버스터와 슬리퍼히트의 ‘투톱체제’를 가동시켜왔다. 앞의 것은 위험하지만 ‘확실성’이 높고, 뒤의 것은 불확실함에도 저예산이어서 위험이 적고 ‘의외’의 성과를 기대할 수 있어서이다. 유의해야 할 사실은 블록버스터이든 슬리퍼 히트 작품이든지 간에 할리우드는 주도면밀하게 ‘계산’했다는 점이다. 조금 기계적으로 말하자면, 최근 어느 한 시기까지 한국영화는 고예산=상업영화, 저예산=작가주의영화로 고착된 듯 했다. 상업영화의 계보에 강우석·강제규가, 작가주의영화 쪽에는 홍상수·김기덕이 메가폰을 들고 있는 모양새였던 것이다.이 구조에서 박찬욱은 양쪽 다를 무시하는 동시에 끌어안아버리는 유별난 재능을 과시했고, 배창호는 [흑수선](블록버스터 상업영화)과 [길](저예산 작가주의영화)로 양쪽을 확실하게 쪼개버려 마침내 자기시대의 종말을 선언한, 역시 유별난 감독이라 할 수 있겠다. 상대적으로 적은 돈을 들인 영화에서는 재능을 과시하다가 뭉칫돈을 쥐어 주자 불편하게 ‘오버’해버린 이가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첫사랑]에서 [형사]로 점프하려다 발을 삔 이명세 감독. 거장 임권택 감독은 어느 위치일까. 평론가 정성일은 “한국영화의 가장 큰 비극은 가장 나이 많은 현역 감독이 가장 실험적인 영화를 찍고 있다”는 말로 임권택 감독의 영화세계를 갈무리했다. 구조의 흐름을 타지 않고 스스로가 구조를 만들어가고 있는 거의 유일한 감독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고예산=상업, 저예산=작가주의 영화? ▲ 태극기 휘날리며. 막대한 물량공세와 치밀한 마케팅을 통해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블록버스터의 전형이다.
여하튼, 지난해 한국영화의 흥행성적은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 ]가 각각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일강다약(一强多弱) 체제를 보여줬다. 이들 영화 다음의 흥행성적은 [귀신이 산다], [우리형], [내 미릿속의 지우개]가 기록한 180만명 선. 한국영화의 흥행 특징 중 하나인 ‘대박 아니면 쪽박’의 양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2004년 이전에도 한국영화는 ‘중간크기’의 흥행성적을 기록한 영화들이 매우 적었다. 양식있는 영화인들이 “흥행영화 한두편으로 한국영화의 부흥을 말하지 말라”고 우려의 목소리를 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런 연유로 2005년은 한국영화사에서 기록적인 한 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 [말아톤]과 [웰컴투동막골]이 각각 518만, 740만+α를 기록하고 있는 가운데 [가문의 영광2 ](370만)-[친절한 금자씨](300)-[공공의적2 ](300)-[너는 내 운명 ](260)-[마파도 ](250)-[박수칠 때 떠나라](200)-[혈의 누 ](180)-[댄서의 순정](180)-[연애의 목적 ](150)-[주먹이 운다 ](140)… 로, 중간이 끊기지 않는 연속적인 흥행스펙트럼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폭, 멜로, 역사스릴러, 휴먼, 판타지 등, 이들 영화들이 매우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가장 최근에는 [야수와 미녀], [오로라 공주 ]가 100만 고지를 눈앞에 두고 선전하고 있다. 바야흐로, 그리고 마침내, 한국영화의 허리층이 튼튼해졌다는 증거다. 몇 주 후면 발해를 무대로 한 블록버스터 [무영검 ]이 개봉된다.

2005년 흥행성적, 이전과 질적으로 달라

지난해 한국영화의 국내시장 점유율은 40% 선. 올해 11월 둘째 주 현재까지는 58%, 최근 3개월간 연속점유율은 70%를 기록했다. 참고로 일본과 프랑스 영화의 자국시장 점유율이 30%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의 한국영화는, 막대한 물량을 투입한 블록버스터 영화와 필요한 만큼의 자본을 들인 중간크기의 ‘웰메이드’ 작품, 여기에 참신한 기획이 돋보이는 슬리퍼히트작까지의 ‘다양성’을 확보한, 매우 안정된 구조를 갖춰가고 있는 모습이 발견된다. 소재도 여러 방면에 걸쳐져 있고, 권위있는 해외영화제 수상 소식도 꾸준하다. 한마디로 ‘한국영화 만세!’ 다.

※통계숫자는 대략치이며, 영화진흥위원회의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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