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꼬치꼬치 분석하며 보는 것은 잘못이다. 영화 볼 때만큼은 영화에 퐁당 빠져서 나를 잊는다. 그렇게 영화를 온 몸에 박아 넣고, 사흘쯤 지나서야 이모저모를 저울질하면서 쪼고 갈고 털고 닦으며 영화이야기를 한다. 내가 좋은 영화 나쁜 영화를 가르는 첫째 기준이 영화의 흡인력이다. 너무 지나치게 빨려들다가, 주변 관객에게서 눈총을 맞기도 하고 핀잔을 먹기도 한다. 이번에 아주 좋지만 2% 서운한 영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를 보면서도 오바했다. 뒷좌석에서 “아저씨, 조용히 좀 봅시다!”며 조심스런 핀잔을 받았고, 영화가 끝나고 앞좌석 사람이 일어서 나가는 듯하다가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사람이야?”하는 눈초리로 나를 슬쩍 훑어보았다. 한 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니다. 나의 ‘교양’ 없는 관람태도로, 그들에게 조금 미안하기는 하다. 그러나 실은 그들의 눈총과 핀잔에 전혀 반성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그런 관람태도를 잘못이라고 여긴다.
근대 서양문명에는 이성이 감성을 지나치게 짓누르는 ‘냉철한 엄숙주의’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게 지나쳐서 때론 마른 건빵처럼 퍽퍽하고 뻣뻣하다. 고전주의가 수렁에 빠져버린 것이다. 이토록 지나치게 클래식한 엄숙주의가 우리에게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여 세뇌하고 강요하면서, 마침내 메마르게 건전한 ‘마네킹 인간’을 만들게 된다. 그게 부처님의 인자한 미소를 비추는 불빛마저 숨죽이는 박물관에서, 모네가 담아낸 그 찬연한 빛의 터치에 눈알 굴리는 소리도 삼가해야 하는 미술관에서, 슈베르트의 달콤한 ‘밤과 꿈’마저도 반듯한 정장차림으로 목에 힘주고 들어야 하는 음악회에서, 글쟁이들의 역동적인 삶의 굴곡에 쌓인 책먼지마저 건들지 말라는 도서관에서, 생생하게 구성진 말솜씨를 잡담이라며 근엄한 설교만이 진리로 경청하라는 강의실에서,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였다. 그렇게 작품과 관객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세워 감히 다가서지 못하도록 무릎 꿇리고 군림하였다. 그리곤 삶의 현장에서 솟아나는 생생한 체취는 멸시하고 억압하고 폭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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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각기동대
우리는 그렇게 짓눌린 감성이 자꾸 부딪히고 꺽이고 숨죽이면서, 때론 정신병적인 히스테리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론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음습한 새디즘이나 마조히즘으로 엇나가게 된다. 그 한 줄기를 잡아낸 것이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이고, 그걸 총체적으로 박치기해 하며 저항한 것이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절규이다. 그게 개인심리로 접근한 [피아니스트]에서 이자벨 위페르가 차갑게 그려낸 클래식피아노 교수의 행태이며, 집단심리로 접근한 [공각 기동대]에서 여자로봇이 고뇌하는 인간과 로봇의 관계이다. 어찌 이 영화뿐이겠는가? 도시문명과 기계문명을 음산하고 삭막하게 그려 가는 영화나 무너져 가는 인간의 질박한 체취를 씁쓸하고 처연하게 그려 가는 영화가, 모두 메마르게 건전한 ‘마네킹 인간’을 만들어낸 근대 서양의 잿빛문명을 향한 회한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야 바야흐로 포스트모던하기 시작한 우리도, 우리의 모든 분야에서 '그 숨막히는 교양'에 저항하고 있다.
그런데 이 왠 일일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포스트모던하다고 할 수 있는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에서 그게 더욱 단단하게 굳어가고 있다니 ... .
그 때 그 시절 그 여고생들의 열광까지 가자는 말이 아니다. 그나마 내 나름으로는 조심한다고 하는 걸, 눈총 주고 핀잔하는 건 잘못이다. 지금
내가 보여주는 정도를 조금 더 넘더라도 암시랑 하지 않는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 나는 ‘그 숨막히는 교양’에 저항한다. 나의 저항이 무조건
옳다는 게 아니라, '지나치게 숨막히는 엄숙'을 반성하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