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 금자, 그리고 순정
정혜, 금자, 그리고 순정
  • 이정우 기자
  • 승인 2005.10.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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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기자의 영화읽기] 오로라공주
▲ 오로라공주... 한국영화사의 계보파일에 우리는 한명의 여감독과 한명의 여배우를 더 보탤 수 있게 되었다. 최근 우리는 세 명의 여자를 만났다. 물론 영화를 통해서다. ‘정혜’ ‘금자’ ‘순정’ 이 그녀들이다. 배우이름으로 바꾸면 김지수, 이영애, 엄정화이고, [여자, 정혜] [친절한 금자씨] [오로라공주]가 그녀들을 만나게 해 준 영화다. 세 여자들은 모두 ‘복수’를 시도했다. 그중 두 여자는 성공했다. 오직 정혜만이 복수하지 못했다. 왜일까, 라는 질문은 부질없다. 감독 맘이니까. 그렇지만 영화의 이야기구조로만 놓고 본다면 질문과 답이 가능하다. 복수에 성공한 두 여자의 복수 동기는 모두 ‘자식’ 이었다. 반면 정혜의 복수 동기는 자기 자신이 받은 상처였다. 자기애(自己愛)보다는 모성이 더 힘이 쌔다는 이야기일까. 어찌 알 수 있겠는가마는 이야기 구조로만 보면 분명히 그렇다. 어느 영화가 더 현실적이냐, 이런 질문도 가능할 것 같다.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답 또한 쉽지 않다. 현실 자체가 천갈래, 만갈래인데, 어느 영화를 두고 현실적이네, 아니네 단정한다는 말인가. 다만 상식의 눈으로 볼 때 [여자, 정혜]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사람 죽이는 일이 그렇게 쉽지마는 않다는 것이 세상의 상식이지 않겠는가. 복수를 꿈꾸고 실행하는 세 여자 ▲ 오로라공주에서 엄정화가 죽여버린 사람들은 관객의 "공분"을 살만큼 충분히 싸가지가 없다.
대중의 욕망 투영이라는 영화의 한 속성을 근거 삼아 어느 영화가 더 ‘속 시원한지’ 따져볼 수도 있겠다. 단연 [오로라공주]가 화끈하다. 금자 손에 죽은 녀석들 중 일부는 관객의 ‘공분’을 살만큼 나쁘게 묘사되지 않았다. 하지만 순정에게 걸려 전혀 친절하지 않게, 잔인하게 살해된 남녀들은 정말로 패주고 싶을 만큼 싸가지 없는 행동을 했었다. 그래서 관객의 ‘공분’을 충분히 살만했고, 꼭 죽일 필요까지 있었나 싶지만, 현실이 아니라 영화였으므로 속은 시원했다.

웰메이드, 그러니까 어느 영화가 더 잘 만들어졌는지 따진다면 [여자, 정혜]와 [친절한 금자씨]가 [오로라공주]보다 한수 위인 것으로 판단된다. 앞의 두 영화는 우선 그 스타일이 강렬하다. 배역도 제 자리를 잘 잡고 있다.[오로라공주]에게서는 새로운 스타일을 발견할 수 없고, 문성근의 자리가 조금 어설프다. 뿐만 아니라 [오로라공주]는, 영화 전반부에 미술감독(프로덕션 디자이너)이 개입하지 않은 영화 같다. 화면의 색감 및 질감이 이야기 전개에 밀착되지 못한 느낌인 것이다. 다행히 후반부로 갈수록 미술은 탄탄해진다.(음악까지를 포함해 이상하게도 이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완성도가 높아진다.)

프로덕션 디자인이 빼어난 작품으로는 [살인의 추억]이 꼽힌다. 이 영화를 참고하면 프로덕션 디자이너의 역할을 알아차릴 수 있다. 여하튼, 2% 부족하게 잘 만들어진 영화로 [오로라공주]를 평가하면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 같다.

2% 부족하게 잘 만들어진 잔혹스릴러

어느 영화에 여성들이 더 환호할까를 생각해봤다. 아무래도 [오로라공주]일 것 같다. 금자씨는 지나치게 똑똑하고, 정혜는 너무 답답하다. 엄정화가 연기한 순정은 연민을 자아내게 하면서도 관객에게는 카타르시스를 준다. 여성들이라면 한번쯤 경험했을 법한 세상의 무례함에, 섹시한 옷을 입고 철퇴를 가하는 여주인공 순정은 여성관객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대리만족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잠깐 엄정화를 짚고 넘어가자. 섹시가수로 출발해 […압구정…]으로 한번 말아 먹고, [결혼은 미친 짓이다] [홍반장] [싱글즈][내게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로 숨가쁘게 달려온 30대 중반의 엔터테이너이다. 얼굴에 칼 댄 자국이 많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오로라공주]에 이르러 마침내 영화배우로의 완전전업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 오로라공주에서 문성근은 중심배역임에도 어울리지 않고 어색하다.
[오로라공주]는 지성파 여배우 방은진의 감독 데뷔작이라는 점 말고도, 엄정화라는 여배우의 수준 높은 연기를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영화임에 분명하다. 한국영화사의 계보파일에 우리는 한명의 여감독과 한명의 여배우를 더 보탤 수 있게 되었다. 축복이다.

영화에 얽힌 앞뒤 이야기 빼고, 방은진과 엄정화 프리미엄 털고, 그냥 볼 경우 여하튼 [오로라공주]는 평범한 잔혹스릴러로 읽힌다. 기대했던 ‘사회적 메시지’가 헐거운 것도 아쉽다. 하지만 범인을 미리 알려주고, 범행동기를 나중에 설명해주는 기법은 참신하다. 물론, 장르는 다르지만 이 기법은 이창동 감독이 [박하사탕] 에서 써먹은 방식이다. 그래도 좋다. 적당히 놀랄 수 있는 반전, 그리고 마무리 화면 또한 맞춤하다. 감독 방은진의 성공적인 데뷔작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틀리지는 않은 듯하다.

문제의 2%, 장르적 특성 등의 이유 때문에, 그럼에도 ‘대박’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역시, 그래도 좋다. 한국영화사에서 이만한 잔혹스릴러는 흔하지 않다. 방은진 감독의 다음 영화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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